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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Apr 24. 2024

아주 오만한 글, 명품학부모 안내서

8. 학교 교육의 본연은 삼각교육

  아이 교육의 첫 번째 책무자는 학부모, 학부모는 부모와 뭐가 다를까?

  부모는 자녀가 학생이 된 순간, 학부모가 된다. 부모와 학부모는 같지 않다. 그저 자녀 때문에 또 다른 호칭 하나를 거저 얻은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직박구리 이야기에서 눈치챘겠지만, 부모의 사랑은 헌신 그 자체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랑이다. 자녀 양육에 모든 사랑을 쏟아붓는 사랑이다.


  학부모의 사랑은, 이전의 부모의 사랑과는 조금 다른 사랑이어야 한다. 학생 자녀에 대해 부모가 교사에 앞서 1차적인 교육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 이전의 어리기만 한 자녀에 대해서는 사회적 질서나 가정 내 규범을 넘나들 수도 있는 사랑이다.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누구보다 먼저 이유식 숟가락을 입에 넣어  줘도 좋다. 아이는 아직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양육의 대상이다(물론 그렇더라도 입학을 앞두고 있을 때까지도 지나친 애정이 지속되면, 아이는 학교에 입학해서도 부모와 떨어지기 힘들어하며 등교를 거부하는 ‘분리 불안장애’를 겪을 수도 있다). 학부모가 될 즈음이 되면 엄마 아빠들은, 무한 사랑, 무조건 사랑에 대해 '다시 보기'를 해야 한다. 다시 보기의 기준선은 '교육적인가?'이다. 학부모의 사랑도 부모였을 적의 무조건적 사랑에서 '교육적 사랑'이란 형태로 성장하고, 조절되고, 절제되어야 한다.


  ‘옳은가?’ 부모로서의 감정 말고, ‘사회적 통념에 비추어 옳은가?’

  사회적 기준에 아이를 비추어 보는 일. 그것이 학교에 입학시키기 전까지의 예비 학부모로서의 교육적 기준선이면 되지 않을까. 모두가 동등한, 함께 사는 환경이 사회가 아니겠는가? 모두가 존중되고, 서로 침해하지 않으며, 모두 함께 행복하자는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우리네 시민사회의 공동 의식이 아닌가? 우리 아이의 최종 목표도 시민사회의 건강한 시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부모로의 자식 교육은, 자녀가 학교에 입학하여 학생이 된 때부터는 좀 더 냉철한 사랑이어야 한다. 자녀에게 생긴 일이 때로는 마음 아픈 일이지만, 자녀에게 동조하고 싶은 그것이 '교육적으로 옳은 일인가' 하는 기준선을 꺼내 들고 아이의 일을 살펴보아야 한다. 기준선 안에서의 일이라면 마음 아픈 일이지만, 자녀를 타이를 수 있어야 한다. 사랑스런 자식의 일이기에 때로 이는 아픈 사랑일 수도 있다.


  자녀가 과제 해결에 곤란을 겪고 있을 때, 자녀를 구해내려 자녀의 팔을 잡아끌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자녀를 대신하고 싶을 수도 있다. 이런 순간 자녀가 묻거나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오래 걸렸지만 자녀가 결국 해결해 냈을 때, 자녀에겐 성장이 일어난 것이다. 작은 이해 충돌을 두고도 학부모는 고민해야 한다. 아무리 작은 일이지만 끝내 그것의 옳고 그름을 밝혀 내도록 이끌어 정의를 실현하는 경험을 줄 것인가, 아니면 단지 순서를 바꾸는 정도의 양보와 포용으로 안내하여, 아이의 친구와 주변으로부터 감사와 덕성을 인정받는 경험을 취하게 할 것인가.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큰 인물로 서의 씨앗을 심어 줄 것인가는 충분히 고민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자녀가 실패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조차 때로는 자녀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서서 안타깝게 지켜보기만 해야 할 때도 있다. 이처럼 학부모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과 달리 많이 아플 수도 있다. 먼 가지에서 새끼들이 굶주리는 둥지 속을 바라보는 어미 직박구리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아버지의 무관심이 자녀를 진학시킨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무관심이 아니라 안타깝고 아프게 인내하는 중일 것이다.


  학교에서 교육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학교에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보다 의미 있게 전달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수업을 기획한다.  공부를 매시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당연하지만 그것은 선생님들의 중요한 책무이고, 선 생님들은 그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제발 부수적인 업무를 줄여달라 호소한다. 벌써 몇십 년째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잘 짜서 펼쳐 준 대로 잘 듣거나, 따라가거나 경험하면서 인류가 기 발견한 진리를 깨닫게 되거나 재발견함으로써 지식이나 지혜를 쌓아간다. 선생님은 다시 학생들이 어슴프레 알게 된 지식에 숭숭 구멍을 낸 다음 이를 문제로 제시한다. 이는 학생들의 지식을 보다 정교하게 한다. 이 단계에서 학생들이 당황스러워하면, 선생님은 수업을 다시 정리하여 학생들의 불안정한 지식을 정돈해 준다. 선생님들의 가르침은 여기까지이다. 선생님은 또다시 내일의 수업을 연구하고 기획하는데 노력을 들인다. 이처럼 학생들은 그저 수동적인 교육의 대상인가? 둥지 속의 아기 직박구리들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비좁은 둥지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보고자 뜨거운 날개 죽지를 들어 올려 퍼득거리곤 했다. 둥지 둘레로 올라도 보았다. 균형을 잃을까 날개를 퍼득여 중심을 잡고자 했다. 그런 수백 번의 날갯짓은 아기 직박구리의 날갯죽지에 힘이라는 실력을 불어넣었고, 마침내 아기새들은 스스로 비상이라는 학문을 터득해 냈다. 둥지 속의 아기 직박구리에게서 학생의 자세를 직관한다. 다만 우리네 학생 교육은 직박구리의 불충분한 먹이와 비좁은 둥지와 같은 괴로움에의 노출이 아니라, 알고 싶은, 도전해보고 싶은 호기심, 도전의식, 불균형을 해소하고 싶은 자발적인 동기가 자극되도록 짜여진 효과적인 수업을 연구해 내기 위해, 선생님들이 머릴 싸매고 있다. 이처럼 선생님들은 매시간 학생들에게 정교한 지식이나 경험을 엮어내어 학생들에게 수업으로 제시한다. 이에 반해 학생들의 실력은 교사로부터 전수받은 지식을 얼마나 많이 되짚어보고, 다시 해보고, 연습해 보느냐에 따라 지식 축적의 정도가 달라진다. 이해의 완성도가 달라진다. 


  교육의 완성은 결국 학생 자신에게 있다. 이를 학부모가 도울 수 있다면, 자녀가 아는 것을, 배운 것을, 배워 익힌 것을 스스럼없이 학부모에게, 일상생활 속에 적용해 보고 반영해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과 끊임없는 칭찬과 격려 정도일 것이다. 사람마다 성장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녀의 성장을 기다려 주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래도 학부모로서 좀더 역량을 향상시키려거든, 지금까지 아이에게 지겹게 들려주었던 식상한 칭찬과 격려의 말 말고, 좀 새롭고 신선하며, 감동적이며 보다 진실한 언어를 개발하는 것 정도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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