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만 한가

공평한가

by 인해 한광일


이건 그냥 순전히 생각이지만, 종교가 있은 뒤에 인류는 생명 존중의 철학을 공유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가 하나같이 생명 존중을 가르치고 있으니, 교재가 다르고 선생님은 다르나, 각 교재의 어느 한 단원은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서로 똑같은 내용이다. 단원의 주제는 바로 생명 존중이다. 그렇다면 세 종교의 경전은 이른바 3종 검인정 도서쯤인 건가? 종교 덕에 인류는 평화롭게 생명 존중의 정신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한다. 실로 생명 존중 정신을 일깨운 종교의 공이 지대하다.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여야 한다는 것은 '피의 프랑스 대혁명' 덕분(?)이 아닌가 한다. 워낙 강력한 쇠사슬을 끊느라, 쇠사슬이었던 귀족 세력 등과 이를 끊어내려던 시민이 서로 많이 죽이고 많이 죽은 결과다. 마침내 왕과 귀족을 몰아내고 시민국가를 세워 냄으로써 쟁취된 자유다. 속박이 운명인 줄 알았던 수천 년의 세월을 찢어내고 쟁취한 것이었으므로, 속박을 놓지 않으려는 억압(귀족 등)은 피를 많이 흘려야 했다. 순순히 내주지 않으려던 그들도, 민초에 대한 속박 그것을, 신께서 그들에게 부여한 특혜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유란 모든 개인이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였다는 것을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민초들도, 귀족들도 모두 깨닫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원천적으로 자유가 생명에게 부여되었다는 것을, 귀족들은 뒤늦게 피맛을 보고 나서야 깨달은 몽매의 긴긴 시간이었다. 함께 되찾은 자유는 당연히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당연한 것이 그러나 그리 쉽지만은 않았던가 보다. 결국 그 커다란 자유를 똑같이 나누기 위해 평등이란 개념이 저절로 따라 나왔을 것이다. 평등을 곁에 두어야 비로소 온전한 자유가 완성된다는 걸 알게 되었나 보다.


생명 존중과 자유, 가장 중요한 인간의 두 가지 권리가 이렇게나 다르게 우리들의 양손에 쥐어졌다. 비로소 귀족도 평민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 시민이 된, 시민사회의 시작이다. 생명 존중과 자유, 이를 똑바로 지켜내고, 다시는 잃지 말자는 약속으로 민주국가를 선언했을 것이다.


생명 존중과 자유를 누림에 있어, 시민 사회라면 어디라도 높낮이란 없어야 한다. 평등, 그것은 현대 사회의 화두이다. 시민 모두가 주인이므로 시민 모두가 공평하게 누려야 한다. 이 화두를 해결하고자 시민국가는 공화국을 선포했을 것이다.


돈이 없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소시민들은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그것이야 자유를 활용하는 능력에 해당하는 것 아니냐는 말에, 시민은 아직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고민이 깊다. 그래도 생명권은 존중받아야 하지 않느냐, 최소선의 생명권은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만은 지켜져야 한다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마침내 우리나라도 존엄한 생명권의 하한선만은 지켜 주자는 복지제도를 갖추게 했다. 그렇다면 생명권을 지원하는 복지제도는 제대로 작동하는가?

얼마 전 서울에서 생활고로 사료되는 세 모녀가 숨진 사건에 아직도 가슴 시린데, 그게 얼마나 되었다고 이번에도 똑같은 이유로 추정되는 수원 세 모녀 사망사건이 발생했단다. 송파구 사건은 2014년의 일이고, 수원 사건은 지금 2022년이니까 8년 만에 다시 벌어진 일이다. 복지제도도 물론 관공서에만 앉아 있진 않았을 것이다. 8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세 모녀들은 숨죽여 살다가 마침내 삶을 죽였으리라. 복지제도가 아닌 다른 그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들킬까, 숨결조차 들킬까, 도와달라는 말도 못 했을 것이다. 경제적 자유를 공평하게 분배하라고 강요하진 않겠지만, 생명권만은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복지제도는 더 좁은 골목으로도 발걸음을 해야 한다. 8년 전 전 국민의 애도가 있은 뒤 8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복지 손길은 조금도 온기를 올리지 못하지 않았는가? 세 모녀, 적어도 그들이 맘 편히 생명을 마실 수 있는, 프라이버시 가리개를 갖춘 공공 우물은 아직 마련되지 못했나 보다. 일어나 앉았으되 공화국(共和國)은 아직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나 보다.


아이를 대학에 보내려면 강남에 살면서 강남의 일타강사에게 족집게 강의를 들어야 하는가 보다. 다들 할 수만 있다면 강남 살겠단다. 강남 학원이라야 아이 손에 더 많이 쥐여줄 수 있나 보다. 그래서 맨손의 시골 아이를 간단히 물리치고 대학에 보낼 수 있나 보다. 강남에 사는 자부심으로 빛을 방사하며, 강남 밖의 사람들에게 선망을 받으며, 강남에 입성하기 더욱 어렵게 경제적 성벽을 높이 쌓는 것이, 아마도 그 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것엔 특별한 쾌감이 있나 보다. 성벽 아래에서 줄을 서야 소용없나 보다. 성벽 사람들은 그곳에서 내려와 자리를 비워줄 생각이 전혀 없나 보다. 지키고 있다가 직계비속에게 물려주려나 보다. 그렇게 다시 공화국의 한가운데서 귀족이 되려나 보다. 공화국(共和國)은 아직 대한민국의 모든 시민들에게 '이만하면 공평합니까?' 물은 적 없다.


애들 학교에서 무료로 밥 먹이 잘 때, 대기업 회장의 손자는 밥을 못 먹을 뻔했었다. 그 회장의 손자만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닐 뻔했다. 아니면 따로 돈 내고 사 먹어야 할 뻔했다. 그래도 먹는 것 두고 그러는 거 아니라며, 시민들의 정겨운 손들이 만류하는 바람에, 다행스럽게도 부잣집 애들도 나란히 시민의 아이와 함께 앉아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학교 밥은 공평한가 물으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공평하다'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학교 급식실엔 공화(共和)가 성취된 모양이다. 다만 양질의 공화를 지향하는 방향성만은 앞으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손잡이이겠지만 말이다.

시민으로 사는 까닭에 생명 존중과 자유(수백, 수천의 의미의), 그리고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는 평등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손에 꼭 쥐고 수시로 생각날 때마다 들여다 보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사회와 국가에 물어야 한다. 생명은 안전한가, 불편을 끼치지 않는가, 그리고 자유는 공평한가? 국가나 사회가 졸고 있으면 안 된다. 시민이 다가가 그만 일어나라고 깨우는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귀성



모든 일요일처럼

오늘도 차들이 기어서
저속도로 됐다

두 시간이면 도착할 걸
네 시간 반이나 걸린 차에게

왜 그리 오래 걸렸느냐

혼내는 것도 아니고

고속도로 통행요금이 징수되었다


고속도로를 저속도로로 기어온 것도

불컥 성질이 올라오는 걸...,

그래도 어둡기 전에 도착한 게

어디냐며 눌러 참았다


시내로 들어서자
어서옵쇼!
허리를 90도로 숙인 가로등이

도로 양쪽으로 도열해서

밝은 얼굴로 깍듯이 맞아준다


누굴

부하로 거느려 본 적 없는 나는

주항색 환대로 해서

어느덧 부아를 지워낸다


고맙다, 가로등

마누라가 못 알아듣는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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