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작 사부작1

보여줄 이 없다면, 무엇을 할텐가?

by 이도백

나는 나에게는 솔직했어야 했다.

나에게도 거짓말을 한 탓에 돌아와버렸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가?


99년 3월부터 25년 7월까지, 약 26년의 서울생활을 마치고 11월, 지금은 강릉에 있다.

무턱대고 떠났다. 계획도 없었고, 돈 천만원과 떠났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이세계물을 즐겨봤다.

주인공들은 낯선 땅에 떨어지고, 잘 곳을 찾고, 일자리를 찾았다.

따라해보자.

’강릉에 나를 던지고, 잘 곳을 찾고, 일자리를 찾아보자.‘


오후 8시, 서울역에서 강릉행 기차를 탔다. 손과 가방에는 짐이 한가득했다. 바지 두 벌, 반팔 세 벌, 양말 일곱 짝, 속옷 일곱 벌, 넓은 챙의 모자, 예비군 소집을 대비한 전투복과 전투화, 서울역 다이소에서 산 캠핑용 스탠냄비, 캠핑매트 ......


최소한의 짐만 챙기리라 했지만, 최소한의 무게는 무거웠다.

’만족의 상단을 낮추고 그에 적응하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

욕심이 많았다.


떠나려는 마음이 9할에서 머뭇거릴 때, 1할을 채워준 고마운 사람이 둘 있다.

하나는 친형이고, 하나는 친구 김씨다.

친구 김씨가 서울역까지 배웅해줬다.


강릉행 KTX 입석, 간이 의자에 앉아, 열차 밖에 김씨를 웃으며 바라봤다. 그때의 웃음은 복잡하고 미묘했다.

사람은 상정한 이미지로 세상을 본다했던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을 김씨의 미소도 달리 보였다. 나의 도전이자 도피를 내비추고 싶었다.

간사한 사람.


문이 닫히고, 열차는 출발했다.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강릉에 대한 기억은 스무살 적에 친구 둘과 여행차 갔었던 기억이 전부다.(김씨도 이 여행에 함께였다.)

강릉역에서 가까웠던 꽃무늬 이불의 여관방, 안개가 자옥했던 대관령, 무한리필 조개구이, 밤에 걸었던 경포대, 잡아탄 택시에서 들은 세 개의 달이 뜨는 경포호이야기 ......


강릉으로 향하던 기차에서 여행의 추억을 곱씹었다.

머물다 떠나는 곳이 아닌, 터전이 될 곳이라 생각하니, 뒤늦게 어렴풋 떠오르는 기억들로 검열을 시작했다.

검열의 결과는?

마~냥 좋았다~

뭘해도 즐거웠던 그때, 추억이라는 보정이 가득 낀 기억 속에 강릉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흥분이,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횡성역을 지났었다.

외할머니댁이 횡성이었다.

횡성역에 정차했을 때, 돌아가신 할머니와의 추억이 휘몰아쳤다.

할머니와 나눴던 말들, 손길, 꼭대기 집으로 뒤따르며 보았던 뒷짐지고 걸으시던 뒷모습, 노란 시니어클럽이 적힌 조끼, 귓구멍이 커서 남의 말을 잘 듣겠다던 걱정하시던 말씀 ......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난 눈물을 쉽게 흘리지 않지.

이날따라 압축된 기억이 팡팡 터졌다.

기억의 단편들은 사실 엄청난 장편들임을 깨달았다.


여기까지 써봤는데 지친다.

사실 도중에 좌상단에 ‘X’를 눌러버릴까도 싶었다.

보여줄 이 없다면 무엇을 할텐가?

보여줄 이가 없다는 전제로 쓴다면, 끝까지 써보고 싶다.

보여줄 이가 있다는 전제면 제대로 끝마칠 자신이 없기에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보여줄 이가 없는 지금이다.

여기서 쉬고 또 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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