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내 마음을 알아 줘
5060,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위로받고 싶은 나의 세 시선
1부. 나의 시선, 그때 나는 이랬는데
새벽 4시 37분에 눈이 떠졌다. 딸 방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니 아직 들어온 흔적이 없다. 머리가 무거워지고 숨이 가빠지면서 평상심을 잃고 가슴도 쿵쾅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현실이 되니 생각보다 감당이 안 됐다. 기왕 기다렸으니 인내를 갖고 들어올 때까지 메시지도 보내지 말고 전화도 하지 말자고 다짐을 하는데도 손은 자꾸 전화기로 갔다. 그래 5시까지만 기다려보자고 하다가 다시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4시 57분이나 5시나 무슨 차이가 있나 싶었다.
“괜찮니?”
감정을 억제하고 최대한 오해가 없도록, 하지만 불편한 심정이 조금은 드러나게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
“네, 지금 택시 잡는 중이에요.”
아마 그 아이도 지금 이 시간에는 쯤에는 시간을 두어 번은 확인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제는 토요일이고 마침 딸도 하루 종일 약속이 있다고 하길래 남편과 함께 지인 집을 방문해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예상대로 아직 딸은 귀가 전이었다. 뉴욕에서 일할 때 알게 된 친구가 서울 부모님 댁을 방문했는데 그 친구랑 점심을 먹을 것이라 했다. 그리고 밤에는 그 친구가 아는 친구들과 함께 저녁 먹고 놀다 늦게 들어갈 것 같으니 걱정 말고 먼저 주무시라는 메시지를 이미 받은 터라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안전하게 들어가겠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내용도 함께 보내왔다. 나이 서른둘인 딸,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12년을 부모와 떨어져 독립해서 살았으니 나름의 생활 루틴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존중하자고 마음을 먹고 나니 마음이 편하고 너그러워졌다. 오늘은 클럽에 갔겠구나 생각하며 1시 30분쯤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눈을 뜬 것이 새벽 4시 37분이었다. 약 3시간 전의 그 평정심과는 달리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별일 없는지 하는 걱정과 이건 아니지 싶은 섭섭한 마음이 동시에 일었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진다는 점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었다. 그 시간에 깨지 않았다면 딸이 들어오기 전까지 속을 태울 일도 화가 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깊게 잠들지 못하고, 쉽게 깨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늦을 것 같다’는 표현은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나에게 ‘늦을 것 같다’란 적어도 2시 전후에는 귀가한다는 의미인데, 딸에게는 다음 날 귀가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 상황이 괘심하고 섭섭한데 딸은 억울하고 당황스러운 것이다. 본인은 할 도리를 다 했으니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택시를 잡는 중이라는 메시지를 받고 좀 더 자 보려고 했으나 계속 뒤척이기만 했다. 하지를 막 넘긴 터라 새벽 5시인데도 밖은 벌써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고 다시 잠들 것 같지 않아 밖에 나가 걷기로 했다.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고 올라오는 화도 눌러져 차분해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걷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들이 갈피 없이 뒤죽박죽이었다. ‘나이가 다르니 생활방식이나 패턴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 오십 아홉 살과 서른두 살이 즐기는 삶의 영역이 완전하게 같아서 거기서 오는 충돌이 전혀 없다면 오히려 그것이 문제이지 않나, 결혼 전 그 나이 때의 나를 떠올려 보자, 등등’ 여러 생각들을 하며 집에 들어온 딸과 눈이 마주쳐도 별스럽지 않게 대하자고 마음을 다독였다. 역시 걷기는 치유력이 크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고 부족한 잠과 놀라움으로 벌떡거렸던 가슴도 조금 진정이 되었다. 딸도 조금은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을까? 나는 내심 집에서 걱정하고 있을 부모를 생각하며 딸이 미안해 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딸이 그런 마음이었다면 나 스스로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마가 시작되어 아침부터 후텁지근한 날씨 탓에 온 몸에 땀이 가득했다. 현관문을 들어서니 딸은 집에 돌아와 있었고, 나의 인기척에 방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닫히는 방문이었지만 내게는 ‘닫힌다’는 것만이 크게 다가와 다시 마음이 와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2부. 너의 시선, 그때 너는 이랬을까?
새벽 5시가 다 된 무렵인데도 논현동은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토요일 밤을 클럽이나 카페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잡느라 분주하다. 몇몇은 근처 해장국집으로 향한다. 몇 번이나 택시를 잡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포기하고 전철을 타야겠다. 마침 첫 차를 탈 수 있는 시간이라 다행이다. 택시로 20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한 시간 동안 돌아돌아 가야한다. 요즘 내가 맞닥뜨린 문제이다.
대중교통으로 출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1시간 20분이다. 첫 출근을 하기 전에는 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딱 하루를 경험해 보니 이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께 이사해야겠다고 말씀드렸다. 처음에는 부모님과 함께 이사하는 것도 괜찮고, 혼자 독립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특히 오늘 같이 친구들과 모처럼 클럽에서 음악을 들으며 자유로운 시간을 보낸 날은 몸도 마음이 편치 않다. 너무 늦어서 차라리 너무 이른 시간이 되어버린 귀가를 하게 되어 마음이 불편하다. 물론 어제 부모님께 메시지로 자초지종을 설명드리고 늦을 것 같으니까 염려하지 마시고 편하게 주무시라고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마음이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부모님께서 지금 사시는 곳은 서울과 인접한 경기도여서 지금 시간에는 택시를 잡는 것도 쉽지 않다. 평일 출퇴근 시간에는 택시를 타도 소용이 없다. 버스, 지하철, 택시 셋 중 무엇을 타도 같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독립을 섭섭해하시는 부모님을 위해 한두 달 더 참고 다녀보기로 했다. 부모님과 좋은 관계로 지낸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이미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고 기대치가 달라져 있어서 맞추기가 어렵다. 각자 입장에서의 최선이 서로 입장에서는 최고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요구가 다르면 노력과 상관없이 실망할 수밖에 없다. 부모님께서도 12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살다가 다시 한 집에서 살게 된, 다 큰 딸의 낯선 가치관에 맞추어 보시려고 나름 노력하신다. 가끔은 그 모습을 보는 것도 불편하다. 의도치 않게 불효를 하고 있는 듯 느껴지는 것은 자격지심일까?
떨어져 살았던 12년, 그때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열흘 남짓 만나는 시간은 늘 짧았다. 모처럼 만나니 반가웠고, 한국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아서 늘 아쉬웠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다정하고 친절했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누고, 말과 행동으로도 서로 아끼고 위했다는데 때로는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느껴지곤 했다. 만나는 시간만큼은 서로가 최선을 다 하려고 애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잠깐씩 만나던 그때보다 함께 사는 지금이 가끔은 편안하지 않을 때가 있다. 뭔가 자연스럽지 않다. 아주 잠깐 느껴지는 어색한 그 기류.
예전에 없던 버릇이 생겼다. 내가 방문을 닫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학교를 다닐 때도 마루에서 공부를 했고, 잠 잘 때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방문을 닫지 않았다. 가끔 집을 방문할 때도 방문을 열고 생활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방문을 닫는다.
하지를 막 지난 때라 5시 40분은 새벽이라고 하기에는 무색할 정도로 밝아서 나의 늦은 귀가가 어둡고 무겁게 느껴진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니 다행히 부모님은 주무시는 듯하다. 소리를 죽이려고 애썼지만 현관문의 자동 잠금장치는 역시 전자음을 크게 낸다. 지금 당장 부모님의 얼굴을 마주할 불편함은 피했으니 이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간단하게 씻고 방으로 들어서려는데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난다. 이 시간에 누구일까? 새벽잠이 없어진 부모님 중 한 분이시겠지. 아마도 예민하셔서 깊은 잠을 못 주무시는 엄마일 가능성이 크다. 일단 민감해진 지금 이 순간은 피하고 보자. 얼른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닫았다. 아마도 엄마는 알아채시지 못하셨으리라 기대하며 밤새 클럽에서 들었던 음악과 중간에 먹었던 삼각김밥의 기막힌 맛을 떠올리며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3부. 우리, 그때 우리는 이랬었던 듯
일이 있어서 출근을 해야 하는 남편은 일요일이지만 아침 8시에 눈을 떴다. 지난 밤, 늦어지는 딸의 귀가가 마음이 쓰여서 중간중간 서너 차례 깼다. 그때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성인이 된 딸이 자신의 안전은 스스로 알아서 더 잘 지킬 것이라 믿으며 애써 걱정을 밀어내려 했으나 깊이 잠들지 못했다. 눈도 몸도 무겁다. 거실 쪽에서 노트북 자판이 타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내가 노란 식탁 등불 아래서 무언가를 타이핑하고 있다. 샤워를 한 후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말을 붙여본다.
“아침 먹을래요?”
쓰고 있던 문장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핑계로 계속 노트북에 시선을 꽂은 채 아내가 대답한다.
“그래요, 뭐 먹을까요?”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남편도 그런 아내의 마음을 알지만 모르는 척 무심하게 말을 건넨다.
“어젯밤에 사 온 빵 구워서 잼 발라 먹읍시다. 난 커피 마실 건데 당신은 오트 밀크 마실래요?”
“그래요,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과는 달리 목소리가 메말라 있다. 아직도 아내의 시선은 노트북 화면에서 떠나질 않는다. 남편이 준비한 단출한 아침 식탁에서 두 사람은 말이 없다. 평소에 대화를 즐기는 아내도 지금은 아무 말이 없다. 늘 스스로 말주변이 없다고 말하곤 하는 남편은 더더욱 이 분위기에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어색할지라도 때로는 침묵이 최선일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때라 생각하고 두 사람 모두 말없이 아침식사를 마쳤다. 다행인 것은 일요일인데도 두 사람 모두 오늘 할 일이 있어서 그것에 집중해야 하니까 잠시라도 딸의 늦은 귀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이 출근을 한 후 아내는 오후 한 시에 있을 한국어 봉사 수업을 준비한다. 학생이 보내온 글을 수정한 후 첨삭한 내용으로 수업을 진행해야 해서 딸이 일어나기 전에 서둘러 이 일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런데 11시 30분쯤 딸 방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아내가 예상한 시간보다 두 시간 정도 이른 시간이다.
“엄마, 저 점심 먹을 건데 같이 드실래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딸이 말을 건넨다.
역시 태연한 척 아내는 대답한다.
“아니, 난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평소 같으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딸을 위해 서둘러 밥상을 차렸을 아내는 아직도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고 있다. 아무리 포장하려 해도 아내의 시선이나 말투도 평상시와 다르다. 여전히 아내는 딸을 쳐다보지 않고 목소리 톤도 낮고 무겁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딸은 자신이 먹을 밥을 차린다. 그런데 이내 아내는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차리기 시작한다. 그러지 말자고, 그러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했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인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아닌 척, 모르는 척, 어색한 공기를 몰아내듯 이런저런 일상을 얘기하기 시작하고 딸은 어젯밤 스토리를 슬쩍슬쩍 내어 놓는다. 그렇게 조금씩 분위기가 편안해질 무렵 딸의 늦은 아침식사가 끝났다.
딸은 처리해야 할 업무를, 엄마는 봉사를 시작한다. 1시 30분쯤 돌아온 남편은 아내와 딸의 기색을 살피며 어제 하다 만 빨래를 하며 틈틈이 낮잠을 잔다. 아내가 일을 하고 남편이 잠깐 조는 사이 볼일이 있었는지 딸은 밖에 나가고 없다. 잠시 후 딸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엄마, 저 4시 30분에 PT가 있는데 그전에 메밀국수 드실래요?”
“늦지 않겠니?”
“국수는 금방 나오니까 서두르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 아빠도 좋다 하시니 먹으러 가자.”
이렇게 해서 세 사람은 다시 평상심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마음에 남아있는 불만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지금 당장 결말을 낼 듯 덤비는 것은 위험하다. 해결책을 찾자고 눈을 부릅뜨는 것도 욕심이다. 그런 시도는 분명 긁어 부스럼을 만들 것이 뻔하니까. 다행스럽게도 이제 그 정도는 아는 나이가 된 것에 감사하며 그냥 이 만큼은 남겨두자고 다독인다. 세 사람 모두 완전한 평상심을 회복했을 때, 그때 말해도 늦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좀 더 참고 기다려 보자. 모두에게 변화를 받아들일 시간과 스스로를 변화시킬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상대방의 눈빛이 어떠한지 살피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공간과 관계, 집과 가족, 지금 우리 셋이 안고 있는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