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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나무 Jul 08. 2022

아버지 1. 아버지의 닭 한 마리

아픔과 그리움의 닭 한 마리

 ‘치맥보다 인맥’, ‘치느님’이라는 표현만 봐도 한국인의 치킨 사랑은 대단하다. 대학시절 동아리 선배는 자취하는 친구에게 매일 닭 한 마리를 선물했다고 하길래 깜짝 놀랐는데 알고 보니 그 닭 한 마리는 달걀 한 알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80년대 자취생에게 매일 닭 한 마리라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 시절에는 달걀 하나를 닭 한 마리라고 생각하고 싶을 만큼 고기는 서민에게 귀했다. 어쨌거나 그 달걀 한 알이 결국에는 닭 한 마리로 거듭날 것이니까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웃자고 농담한 선배 말을 내가 진담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닭은 영양도 맛도 좋다. 그래서 몸이 허하거나 아플 때는 보양식으로 삼계탕이나 닭죽을 먹는다. 운동 마니아들은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이는 예쁜 몸매나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 닭 가슴살을 먹기도 한다. 때로는 기분이 좋아서 혹은 기분이 우울하다는 이유로 혼자 또는 함께 치킨에 맥주를 즐긴다. 이렇듯 한국인의 치킨 사랑은 대단해서 일인 평균 월 2~3회 정도는 닭고기를 먹는다고 한다.


 이렇듯 쉽게 먹을 수 있는 닭고기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일 수 있다. 우리 아버지께 닭이 그랬다.


 아버지께서는 돈을 거의 쓰시는 분이 아니셨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주 다툼을 벌이셨고 우리 일곱 남매도 늘 그런 아버지가 불만이었다. 한 푼이라도 돈이 생기면 절대 쓰시는 일 없이 모으셨고, 웬만큼 돈이 모아지면 땅을 사셨다. 아버지 손에 돈이 들어가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셨지만 어머니께서 임신을 하실 때마다 꼭 닭 한 마리를 사 오셔서 어머니께 직접 요리해 주셨다. 어머니께서는 1950년 맏딸인 큰언니를 시작으로 일곱 남매를 낳으셨다. 그 시절에는 워낙 먹을 것이 부족했고, 입덧까지 심하셨던 어머니께서는 임신 기간 내내 먹지를 못 하셨다고 한다. 일 년 열두 달 내내 할 일은 산더미인데 입덧으로 드시지를 못 하니까 가끔은 일을 하시다가 쓰러지시거나 까무러치시기도 했다. 지독하다 할 만큼 절약하셨던 아버지이셨지만 어머니께서 아이를 가지셨을 때에는 꼭 닭 한 마리를 사 오셔서 직접 요리해 주셨다. 아버지께 닭 한 마리는 무엇이었을까?

 아버지께서는 할머니 제사상에도 꼭 닭을 올리셨다. 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께 닭 한 마리는 어떤 사연일까? 1921년에 태어나신 아버지의 유년과 청년 시절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적인 상황보다도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 나가야 하는 생존의 문제가 더 두렵고 공포스러운 때였다.


 하지만 아버지를 더 불우하게 만든 것은 모성의 부재였다. 할머니께서는 아버지를 낳으시고 일곱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가지셨을 때 할머니께서는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먹을 것이 부족한 때라 영양 공급이 충분하지 않았고, 몸도 늘 부어 있었다. 입덧이 심하셨던 할머니께서는 닭을 몹시 드시고 싶어 하셨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 집에서는 닭을 몇 마리 키우고 있었는데 마음 독한 증조할머니께서는 임신중독증으로 퉁퉁 부은 할머니께 끝내 닭 한 마리 잡아 주지 않으셨다.


 아버지께서 태어나시고 일곱 달이 되어갈 즈음 집에서 키우던 닭이 죽었다. 아버지를 낳으신 후 건강이 더 안 좋아져서 시름시름하시던 할머니께서는 마침 죽은 닭을 보고 그것이라도 먹고 싶어 하셨다. 욕심 많은 증조할머니께서는 살아 있는 닭을 잡는 대신 할머니께 죽은 닭을 먹게 하셨고, 그 닭을 드신 후 시름시름 앓던 할머니께서는 끝내 돌아가셨다.


 태어난 지 겨우 일곱 달이 된 아들을 두고 임종을 맞게 딸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외증조할아버지께서는 당신이 잘 키우시겠다며 눈을 감는 딸을 안심시키셨다. 그렇게 외증조할아버지의 두루마기에 싸여 외가로 가셨던 아버지께서는 이후 12년 동안 외가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요즘에는 그 흔하디 흔한 닭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일 수 있다. 우리 아버지께 닭 한 마리가 그랬다. 닭은 아버지께 아픔이고 그리움이었다.


 아이를 가지신 어머니를 위해 닭을 사 오셔서 직접 요리를 해 주실 때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당신이 태어나신 지 일곱 달 만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을 아버지께서는 기억하실 리 없지만 그날만큼은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리시지 않았을까?


  나는 아버지께서 닭고기를 드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닭고기를 좋아하셨을까? 만약 지금 아버지께서 살아계신다면 나는 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를 다정하게 나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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