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직장 그만두었어요.”
오래전 일이다. 졸업한 제자가 찾아왔다.
“선생님, 저 자퇴했어요.”
“자퇴라고? 아니 왜?"
“저 중국으로 유학 가요.”
중학교 3학년 담임을 할 때 만났던 정말 똑똑하고 야무진 여학생이었다. 학급 회장을 맡았는데 학급운영을 얼마나 야무지게 잘하는지 담임인 내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00야, 0월 0일 합창대회가 있대.”
“네, 알겠어요. 제가 애들하고 알아서 연습할게요.”
이렇게 시원하게 대답을 하고는, 정말 알아서 파트도 나누고 반 아이들과 함께 연습을 했다. 이삼 주 후에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어보면 근사한 합창을 들려주었다.
“00야, 이번 주에 00돕기 성금모금이 있다는데.”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고는, 알아서 모금을 한 후 담당부서에 전달까지 마쳤다. 사실 교사인 나보다 더 유능한 학생이었다. 리더십도 뛰어나서 아이들과 관계도 아주 좋았다. 그 친구는 외고에 지원을 했는데 합격을 하지 못해서 일반고에 배정을 받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입학을 한 후, 본인이 기대했던 학교 분위기가 아니었던지 자퇴를 하고 유학을 가기로 한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동생을 데리고 떠난 중국 유학,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았을 텐데 대견하게 북경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에 돌아와 고려대에서 정치외교학 석사를 마친 후 일을 하다 결혼을 했다. 그리고 아이를 출산하면서 직장을 그만둔다고 했다.
“선생님, 저 직장을 그만두었어요.”
“아니, 왜?”
“아이를 제가 직접 키우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구나. 다른 방법이 없었어? 얼마 동안 일을 쉴 거야? 나중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어?”
나는 여러 질문을 쏟아냈다. 아이를 직접 키우겠다는 말에 강하게 내 생각을 표현하지는 못 했지만, 전문직에서 일하던 제자가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둔다고 하니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그때 처음으로 여성에게 있어서 출산과 육아가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잘 돌봐 주신 따뜻하고 믿을 만한 분이 계셔서 큰 어려움 없이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출산과 육아가 여성의 사회적 활동에 어떤 제약이 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출산과 육아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는 유능한 제자를 보며 세상의 많은 여성들이 출산과 육아로 인해 겪게 되는 어려움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체감했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생식-욕구와 생성-욕구만을 느낀다. 생식하거나 생성하거나. 이것이 인생이다. 생식이 아이를 창조하는 일이라면 생성은 가치를 창조하는 행위다. 인간이 신의 완전성, 자연의 법칙에 다가가는 길은 이 두 가지뿐이다. 둘은 근원적으로 하나다. 생명을 낳는 것과 가치의 창조는 분리될 수 없다. (…) 여성은 생식을 통해 우주와 소통하고, 남성은 가치의 생성을 통해 자연과 감응한다. 결국 여성이건 남성이건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이것뿐이다 - 생명을 낳거나 가치를 창조하거나!
가부장제의 등장과 더불어 성적 불평등과 위계는 마치 보편적 원리처럼 행세하기에 이르렀고 (…) 여성은 생명을 낳는 것의 거룩한 의미를 망각해 버렸다. 성적 불평등이 거의 해소되었다는 오늘날에도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고 재산을 일구는 행위를 하기는 하지만 그게 과연 우주적 창조에 동참하는 것임을 알고 있을까? 아마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여성들이 그렇다. 출산은 인구정책의 일환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생명을 낳고도 우주적 환희는 없다. 양육에 드는 돈, 감정 소모, 경력단절 등이 여성들을 짓누른다. 그러니 임신과 출산, 양육은 지독한 노동이거나 상처투성이일 수밖에.
(고미숙,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120~121쪽)
여성들은 출산을 한 후 직장생활과 육아를 동시에 잘할 수 없겠다는 것을 절감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맞닥뜨릴 때가 있다. 노후를 즐기려는 은퇴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부모들에게 육아를 부탁할 수도 없고, 아직 여성들이 맘 편하게 직장생활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린 자녀를 둔 여성들의 어려움은 더욱 커지고 있다.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이 많아지면서 출산을 통한 생명 창조보다 직업을 통한 사회적 가치 창조에 더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여성들은 출산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치를 창조할 능력을 갖추었다고 스스로를 인정하기 때문에 더 이상 결혼과 출산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직업을 통한 가치 창조가 출산과 육아를 통한 가치 창조보다 더 우월하다는 가부장적 편견이 아직 남아 있는 사회분위기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의 폭이 넓어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도 육아가 여전히 여성들의 일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녀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이 낳은 결과인 측면도 있겠지만, 생물학적으로 남자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창조적 행위에 직접적으로 혹은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성은 출산과 육아를 통한 가치 생성에 만족할 수도 있다. 반면 남성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창조적 행위에 직접 참여할 수 없으므로 다른 분야에서 가치를 생성하고 만족을 얻으려는 욕구가 강해지는 것이 아닐까?
제자가 출산과 육아로 인해 직장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내가 느꼈던 안타까움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여성에게 임신, 출산, 그리고 육아의 과정은 행복과 고난이 함께 하는 긴 여정이다. 입덧은 그 어떤 말로도 형용이 안 되는 것으로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인간의 본능인 식욕이 없어지면서 그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입덧이다. 서서히 배가 불러오면 자신의 신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고, 그로 인한 불편함도 감수해야 한다. 출산의 고통을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하루 혹은 이틀이면 끝나기에 감수할 수 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육아와 자녀교육,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출산과 육아, 그리고 자녀교육을 감내하는 것은 그 모든 과정이 위대한 창조적 행위라는 본능적 인식 때문이 아닐까?
미래사회가 어떻게 변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1932년 올더스 헉슬리가 쓴 책인 ‘멋진 신세계’에서 인간은 공장에서 제품처럼 생산된다.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남성의 몸이나 혹은 특수한 기계에서 40주 동안 아이가 성장한 후 태어날 수도 있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지금 우리가 염려하는 저출산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출산과 육아로 인해 여성들이 사회적 활동의 제약을 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다. 그런 면에서 여성의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는 가장 숭고하고 의미 있는 창조적인 활동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