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단했던 삶을 굴려 빚은 기도 -
구미에 사는 막내 남동생이 요양원에 계신 엄마를 뵈러 온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나타나신 엄마를 만났다. 여윈 얼굴 위로 특유의 고집스러운 눈썹만이 예전 그대로다. 평소엔 자식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말수도 없으시더니, 오늘은 웬일인지 환하게 웃기도 하시고 우리와 눈도 맞추어 주신다. 말의 뜻도 이해하고 당신의 생각도 표현하신다.
우리는 엄마가 성당에 다니며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던 묵주 다섯 개를 가져와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던 엄마의 때 묻은 묵주. 그 알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더듬다 보니 그 속에 맺힌 엄마의 흔적들이 선명하게 만져졌다. 슬픔과 분노, 외로움과 설렘, 그리고 차마 내뱉지 못한 억울함과 기쁨이 그 작은 묵주알 속에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문득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나셨고, 성환에 살던 엄마는 한 달에 한 번 월급을 찾으러 서울에 있는 은행을 오가셨다. 그러다 무슨 결심이 서셨는지, 엄마는 자식 넷을 데리고 무작정 상경을 하셨다. 타향살이의 설움 속에서 어린 자식들을 키워내느라 얼마나 가슴을 졸이셨을까.
다행히 초등학교 6학년쯤 되었을 때, 엄마가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집도 사고 버스도 샀다. 아마 그때가 엄마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막내 동생도 태어났고 두 분 사이도 유달리 좋았다. 하지만 행복은 짧았다. 유복자로 태어나 거친 삶을 살아야 했던 아버지의 무의식은 이따금 엄마를 힘들게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셨다. 습관처럼 트림을 하시던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그것은 차마 밖으로 내뱉지 못한 억울함을 억지로 삼켜 내려던 몸의 신호였음을.
나는 오랫동안 엄마를 그저 ‘나의 엄마’로만 알고 살았다. 엄마의 어린 시절이나 소녀 시절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엄마의 고단한 삶이 싫어 애써 외면하기도 했다. 맏이로서 그 삶의 무게가 내게 옮겨올까 봐 두려웠던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홀로 사 남매를 키워내기 위해 강해지셨다. 부끄럼 많던 엄마가 집 근처에서 계란 좌판을 벌이기도 하고, 입양 전의 아이들을 위탁해 키우기도 하셨다. 대학교 청소부 일을 하시면서도 오직 자식들을 위해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온몸으로 살아내셨다.
내가 ‘뇌교육’을 만나 내 안의 신성을 마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엄마가 진심으로 고마워졌다. 내게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모진 풍파 속에서도 따뜻한 심성을 잃지 않고 물려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엄마는 단순히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 한 사람의 귀하고 아름다운 영혼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엄마가 여든다섯 살쯤 되었을 때, 치매 판정을 받고 요양원에 가시기 전 3주 정도 함께 지낼 시간이 있었다. 그때 정말 온 정성을 다해 엄마를 모셨고,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이 가난해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고 싶다고 졸랐다가 외할아버지께 무지하게 혼이 났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도 그때 들려주셨다.
몇 달 후 담낭 수술을 하시고 난 뒤에는 마치 어린 소녀처럼 말씀하시기도 했다."나도 오빠가 둘이나 있어. 나도 사랑 많이 받았다고. 그런데 의사들이 왜 나를 아프게 해? 아버지랑 오빠들한테 다 이를 거야." 엄마의 깊은 내면 속에서 사랑받고 싶어 하던 그 어린 소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지며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하며 올라왔다.
나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엄마의 삶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새삼 느낀다. 늘 말수가 적고 퉁명스러우셨지만 그 속은 바다처럼 넓으셨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나의 용기도, 한번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해내는 근성도,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심도 모두 엄마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거울 앞에 서면 그 속엔 엄마가 계신다.
이제야 겨우 철이 드나 보다. 엄마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엄마, 미안해. 이제야 엄마의 고단했던 어깨를 보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우리 곁을 지켜줘서 고마워. 진심으로 사랑해. 엄마는 내 인생에서 가장 훌륭하고 귀한 사람이야."
내 손등 위로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엄마의 묵주알 위로 번진다. 평생 자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굴리며 빚어냈을 엄마의 기도 소리가 낡은 묵주알 속에서 은은한 파동이 되어 들려오는 듯하다. 고단했던 삶을 기도로 버텨온 그 거룩한 흔적을 이제 내가 가슴에 품고 살아내려 한다.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