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새들을 만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적응한 위대한 생명력을 본다
입춘이 지나고 나니 바람결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겨우내 차갑게 얼어붙었던 양재천의 시냇물은 어느새 따스한 햇살을 머금고 반짝이며 흐른다. 물가에 머리를 박고 먹이를 찾는 청둥오리들과 나뭇가지를 물고 부지런히 둥지를 트는 까치를 보며, 문득 이 작은 생명들이 견뎌온 시간의 깊이가 얼마나 될까?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이 연약해 보이는 날갯짓 너머에는 사실 거대하고 장엄한 지구의 역사가 숨어 있다.
우아하게 서 있는 백로나 왜가리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묘한 경외감이 든다. 현대 고생물학은 이들이 수천만 년 전 지구를 호령하던 수각류 공룡의 직계 후손임을 말해준다. 거대한 티라노사우루스와 우리 곁의 작은 참새가 한 뿌리라는 사실은 언제 들어도 신비롭다. 특히 마니랍토라 그룹은 새와 가장 닮은 공룡들이다. 이들의 긴 팔과 유연한 손목뼈는 훗날 하늘을 향해 날갯짓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속이 빈 가벼운 뼈와 S자형 목, 그리고 무엇보다 따스한 깃털을 공룡이 남겨준 거라고 한다.
6,600만 년 전 거대 운석이 충돌했을 때, 우리가 흔히 아는 거대 공룡인 비조류 공룡들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모두 멸종했다. 만약 수각류 공룡 중 일부가 '새'라는 형태로 진화해 두지 않았다면, 오늘날 지구상에서 공룡의 흔적은 오직 화석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결국 그 용기 있는 '마니랍토라' 조상들이 하늘을 꿈꾸고 몸집을 줄이며 적응해 온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양재천에서 공룡의 후예들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기적 같은 일상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새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이다.
1861년 발견된 시조새는 공룡과 새를 잇는 위대한 징검다리였다. 이빨과 발톱을 지닌 공룡의 몸에 비대칭 깃털이라는 날개를 달았던 그 존재는, 어떤 마음으로 처음 하늘을 향해 몸을 던졌을까? 나무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며 느꼈을 두려움, 혹은 지상을 달리며 바람을 가를 때 느꼈을 설레임이 지금 우리 머리 위를 지나는 날갯짓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흥미롭게도 깃털은 처음부터 비행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단열재였고, 짝에게 잘 보이기 위한 장식이었으며, 알을 품기 위한 부드러운 이불이었다. 생존을 위한 깃털이 오랜 세월을 거쳐 날개가 되었다는 것이 참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인간은 날 수 없음에도 늘 하늘을 동경해 왔다. 그 간절함이 새를 보며 봉황이나 불사조 같은 존재를 만들어냈다.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봉황,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는 불사조는 고난 속에 있는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위안과 희망을 건넨다. 우리가 미처 이루지 못한 꿈들이 그 화려한 깃털 속에 담겨 하늘을 대신 날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새가 하늘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다. 타조와 펭귄은 비행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타조에게 땅은 시속 70km로 내달릴 수 있는 광활한 활주로다. 거추장스러운 날갯짓 대신 대지를 박차고 나가며 타조는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펭귄 역시 바다라는 '밀도 높은 하늘'을 선택했다. 날개는 물을 젓는 지느러미가 되었고, 펭귄에게 푸른 바다는 가장 자유로워지는 공간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날지 못하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자신의 환경에 가장 완벽하게 스며 든거 일수도 있겠다.
우리는 지구에 인간의 모습으로 왔고, 새들은 새의 모습으로 와서 함께 살고 있다. 비둘기가 바쁘게 먹이를 쪼고 까치가 정성스레 집을 짓는 일상의 풍경은 그 자체로 거대한 생명의 몸짓이다. 때때로 삶이 안개 속 같고 용기가 없어 날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 나는 그들을 바라본다. 하늘이라는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땅과 우리가 헤엄치는 삶의 바다 모두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이라는 것을 그들은 보여준다. 억겁의 시간을 버텨온 이 위대한 생명들과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오늘따라 양재천의 햇살이 더욱 눈부시고 나의 생명도 찬란하게 느껴진다.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