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울수록 깊어 지는 삶
거울 앞에 서서 가만히 들여다본다. "거기 계신 분은 누구신가요?" 물어본다. 날마다 마주하는데도 문득문득 낯선 얼굴이 서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머리숱은 듬성해지고, 얼굴의 주름은 깊어만 간다. 보기 싫어 한동안은 모자를 눌러쓰고 다녔다. 내 허리는 어디로 간 거지? 잃어버린 허리 라인을 감추려 넉넉한 옷차림으로 몸을 숨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나를 감추던 것들을 하나둘 내려놓아 보았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자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편안한 미소가 드러나며 비움으로 빚어낸 의연함이 있다.
찬 바람이 불고 마지막 남은 잎새마저 떨어진 산등성이에 서 본다. 벌거숭이가 된 채 서 있는 나무들의 모습은 애처롭기보다 오히려 의연하기까지 하다. 화려한 잎과 꽃에 가려 보이지 않던 나뭇가지가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하늘을 향해 나란히 서 있다. 저들은 지금 다 내려놓고 비워내며, 보이지 않는 뿌리와 깊은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매서운 추위를 견뎌내며 봄을 맞이할 채비를 묵묵히 해나가고 있나 보다.
어느 날 목련 나무의 눈비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 작은 껍질 속에 이미 봄의 소식을 품고 있더라. 겨울나무의 꽃눈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봄을 향해 가장 뜨겁게 기다리고 있는 상태이다. 제자리에서 환경에 굴하지 않고 깊게 뿌리 내리며, 제때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나무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운다.
청춘보다 향기로운 '익어감'의 시간. 나 역시 지금 겨울나무처럼 비우고 응축하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 '나'라고 고집했던 껍데기들을 잘라내고, 내면의 깊은 곳에서 '지혜'라는 오랜 친구를 만난다. 젊은 날의 풋풋함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늙은 호박이나 노각으로 만든 음식처럼 시간이 빚어낸 깊은 맛이 내게서도 배어 나오길 소망해 본다.
겉모습은 나이 들어가지만,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은 오히려 새로운 청춘을 맞이하고 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이 가슴을 뛰게 한다. 늘 지나치던 풍경 속에서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작은 파란 꽃, 갈대숲 사이로 재잘거리는 작은 새들, 그리고 유난히 푸른 겨울 하늘의 뭉게구름까지도. 들리지 않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제는 소리 없는 것들의 속삭임도 느낄 수 있다.
포도알이 익어가는 달콤한 소리, 달팽이가 제 삶을 짊어지고 느릿하게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어느 별이 자기 사명을 다하고 고요히 스러지는 소리. 누군가 나를 위해 나직이 읊조리는 기도 소리, 볼을 스치는 봄바람 소리까지.
나이 든다는 것도 참 근사한 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어설프고 거칠었던 삶이 조금씩 익어가고 있다. 겨울이 지나면 그렇게 봄이 오듯, 우리 또한 언젠가 이 답답한 몸이라는 허물을 벗고 광활한 우주의 빛나는 별로 다시 태어나겠지. 그날이 오기 전까지, 나는 '지구별'이라는 이 아름다운 여행지에서의 하루하루를 소중한 추억으로 새겨보려 한다. 비어 있는 가지 끝에 햇살이 머물 듯, 내 남은 생도 그렇게 맑고 향기롭게 익어가기를 소망해 본다.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