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은 아름답고 위대하며, 그 속에 뿌리내린 나도 그러하다
몇 년 전 수원에 살던 때의 기억이 난다. 새벽녘에 창밖을 내다보니 작은 ‘청개구리 공원’의 그네와 미끄럼틀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 깔깔거리며 웃던 손녀들의 해맑은 모습이 남아있다. 근처 주말농장에는 노란 호박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흔히 못생긴 여자를 비유할 때 호박꽃이라 말하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그것은 어떤 화려한 꽃보다도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이었다. 호박꽃이 지고 난 끝에 조그많게 달린 애기 호박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표현에 서툰 나의 남편, 한창 연애하던 시절의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활짝 핀 호박꽃처럼 예쁘다"고 말했다.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 있던 시절이라 그 투박한 말조차 신선한 고백으로 들렸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기억을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애호박을 반달 모양으로 썰어 살짝 절인 뒤, 새우젓을 조금 넣어 볶아내고 마지막에 들기름 한 숟가락을 넣고 통깨를 솔솔 뿌린다. 이 소박한 재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고소하고 깊은 맛은, 먹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인생의 맛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대개 꽃보다 열매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 그러나 호박꽃은 누군가의 판단이나 시선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생명력으로 묵묵히 피어날 뿐이다. 꽃이 없이는 열매 또한 맺힐 수 없다는 순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살아가며 좋아하는 꽃이 자꾸 바뀌는 것은 그 꽃에 서린 기억이 제각기 다른 추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슬픔을 머금은 진달래, 청초한 코스모스, 향기로운 찔레꽃, 탐스러운 함박꽃, 그리고 겸손한 할미꽃과 신비로운 나팔꽃까지.
작은 숲길에서 마주했던 진달래는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조금 어둑한 숲 한구석, 마치 주인공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처럼 황금빛 햇살이 내리쬐는 곳에 한 송이 할미꽃이 피어 있었다. 자줏빛 꽃잎에 보송보송한 솜털을 두른 할미꽃은 고개를 숙인 채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왜 이 꽃을 할미꽃이라 불렀을까. 겸손하게 고개를 숙인 모습이 허리 굽은 할머니를 닮아서였을까. 요즘 나는 그 할미꽃을 닮고 싶다고 생각한다. 고개를 숙임으로써 세상을 더 깊이 품는, 지혜롭고 우아한 자줏빛 할미꽃 말이다. 손녀가 처음 말문이 트여 나를 부르던 다정한 "할미"라는 소리. 할멈도, 할머니도, 할미도 이제는 그저 정겹고 좋다.
여름날 아침, 눈부시게 피어나는 자줏빛 나팔꽃은 또 어떠한가. 마치 다른 별에서 날아온 신비한 존재처럼, 이른 새벽부터 나팔을 불며 잠든 세상을 깨우는 전령 같다. 노란 산수유와 벚꽃이 봄의 길목에서 화사함을 선사하고, 목련의 꽃봉오리가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니 곧 고결한 자태를 드러낼 모양이다.
피는 꽃은 저마다의 이유로 다 아름답다. 길가의 민들레도, 밤을 지키는 달맞이꽃도, 이름 없는 작은 들꽃들도 온 힘을 다해 피어나기 때문이다. 한 송이 꽃이 피었다고 해서 당장 봄이 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미 내 마음속에는 진짜 봄이 들어있다. 아름다운 이 봄날, 내 마음의 꽃들도 저마다의 빛깔로 활짝 피어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위대하며, 그 속에 뿌리내린 나 또한 그러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