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타고 만난 자연스러운 감정들
초등학교 시절. 넉넉지 못한 용돈 탓에 차비를 아껴 가며 사 먹었던 가느다란 고구마튀김과 풀빵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어린 나이에 철길과 터널, 구멍 뚫린 다리를 건너는 일은 꽤나 아찔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입안을 감돌던 풀빵의 단맛은 그 두려움을 기꺼이 이겨내게 할 만큼 강렬했다. 밀가루 반죽 속에 숨겨진 작은 팥소 하나에 온 마음을 뺏겼던 그 시절. 그래서일까, 삶의 무게가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팥이 든 찹쌀 도넛이나 붕어빵을 찾게 된다. 그건 나도 모르게 위로받고 싶은 무의식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진 장기기억은 결코 건조한 정보의 나열이 아니다. 뇌 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기억은 당시의 강렬한 감정들과 함께 녹아들어 하나의 패키지로 저장된다. 우리가 특정 장소에서 흐르는 음악이나 음식의 냄새만으로도 순식간에 타임머신을 탄 듯 과거로 회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종로 다방에서 들려오던 DJ의 멋드러진 음성, 야간대학을 다니며 올랐던 남산의 풍경이 수채화처럼 그려진다.
특히 신촌 로터리의 디스코장 ‘우산속’에서의 20대 초반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밴드의 생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다 부르스 음악이 나오면 수줍은 척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길 기다리던 그 어설프고도 순수했던 풍경들. 때로는 본능적인 욕구가 올라오면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뇌의 작용이자 살아있음의 증거였다. 지금은 그런 감정조차 사치로 느껴진다.
우리는 흔히 감정을 통제하고 억누르는 것이 미덕이라 말한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을 막아서면 마음의 찌꺼기를 남아 삶을 왜곡시킨다. 슬플 때 마음껏 슬퍼하고, 기쁠 때 소리를 지르며 방방 뛰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뇌가 가진 건강한 정화 시스템이다.
내일은 나 자신을 위해 새알심 가득한 팥죽 한 그릇을 선물하려 한다. 그 뜨끈한 온기를 빌려 내 안의 억눌린 감정들을 부드럽게 녹여내고 싶다. 팥의 달콤함이 어린 시절의 공포를 이겨내게 했듯, 이 작은 위로가 나를 따듯하게 해줄 것이다.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