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꿈꾸듯 살아간다

꿈은 무의식이 건네는 정성 어린 속삭임

by 해온 정옥랑

꿈은 왜 꾸는 걸까? 살면서 유독 마음 한구석에 선명하게 남은 꿈들이 있다. 돌이켜보면 여러 상황 속에서 억눌렸던 감정들이 무의식이라는 방에 갇혀 있다가, 밤이 되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내면을 뛰어다녔던 것 같다.


어릴 적에는 유난히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거나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자주 꾸었다. 심장 박동 소리가 두뇌 깊은 곳까지 울려 온몸으로 퍼지고, 땀으로 흥건히 젖은 옷이 그때의 두려움을 말해주곤 했다.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막막함 속에 목구멍까지 차오른 비명은 끝내 터져 나오지 못했다. 어른들은 그저 키가 크려고 그러는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칼 융은 이를 다르게 보았다. 쫓기는 꿈은 우리가 외면해온 내면의 ‘그림자’가 이제는 나를 좀 봐달라며 말을 걸어오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가끔 자유가 간절할 때면 하늘을 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발을 세 번 구르면 몸이 가뿐하게 솟아올라 높이 날아가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몸이 아래로 서서히 추락할 때면 나를 잡으려는 사람들의 손길이 닿을락 말락 하여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융에 따르면 이러한 비행과 추락은 자아의 팽창과 현실로의 귀환을 반복하며 우리 마음이 스스로 균형을 잡아가는 신비로운 과정이다. 꿈은 때로 현실의 아픔을 투영하기도 한다.


계곡에 맑고 푸른 물이 위에서 아래로 끝없이 떨어지고 그 물결에 몸을 실어 미끄럼을 탄다. 꿈에서도 가슴속까지 시원하다. 흐르는 물이 강으로 퍼져나가며 마침내 내가 물 자체가 되는 순간, 개별적인 고통은 커다란 생명의 흐름 속으로 녹아든다.


죽어가던 세 그루의 고목나무를 향해 마음으로 "살아나라"고 빌었을 때, 가지마다 싹이 돋고 수많은 꽃이 피어나던 그 기적 같은 장면을 기억한다. 그것은 내 내면의 생명력이 결코 마르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무의식의 응원이었다.


동네 미로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에잇, 꿈일지도 모르니 눈을 떠야지" 하며 깨어날 때가 있다. 꿈속에서는 그토록 현실 같더니 깨고 나면 또 다른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문득 우리가 사는 이 현실도 죽음 앞에서는 한바탕 꿈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이런 깨달음이 찾아오자 비로소 삶이 한결 가벼워진다.


하고 싶은 것을 기꺼이 하고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을 자유, 그리고 때로는 하고 싶은 것을 참아내고 하기 싫은 것도 묵묵히 해보는 용기. 결국 손바닥과 손등이 한 판이듯, 삶의 기쁨과 슬픔, 꿈과 현실도 결국 하나라는 것을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이게 된다.


융의 말처럼 꿈은 우리를 꾸짖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온전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는 무의식의 조언이다. 쫓기고 추락하며 아파했던 나의 모든 꿈은, 결국 고목에 꽃을 피우고 나를 맑은 물로 흐르게 하기 위한 정성 어린 속삭임이었던 셈이다. 오늘도 나는 그 속삭임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현실에서도 꿈꾸듯이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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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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