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다 보면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들여다볼 일이 예전보다 많아진다.
아마도 쓰기가 나로부터 출발하다 보니 나의 감정을 들여다볼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을 감정으로 나타낸다면 무슨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불안, 성급, 정의, 소심, 유머, 화(분노),
짜증, 걱정, 공감, 소통, 의리, 따뜻함..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불안이다. 그리고 이어져 나오는 것들도 썩 유쾌하지 못한 감정들로 대략 훑어봐도 부정적인 것들이 많다. 얼마 전 '불안'에 대한 내 감정에 대해 들여다보았을 때, 그 안에 있는 욕심이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극복되지 못하는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나의 욕심 말이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내 마음 깊숙이 자리하여 평생을 따라다닌 감정, '분노'에 대해, 도대체 어디서부터 였는지 알아볼 참인데,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울분'도 같이 들여다보았다.
이 두 단어의 미묘한 차이가 궁금하여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정의해 준다.
그런데 두 단어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내가 이제껏 느꼈던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울분'에 가까운 것임을 알게 되었고, 내가 느끼는 두 단어의 차이점도 보였다.
첫째, 분노한다는 것은 '분개하여 몹시 화를 내는 것'으로, 이렇게 표현하려면 기본적으로 '용기와 배짱'이 필요함을 나는 직관적으로 안다. 소심한 나로서는 남들 앞에서 분노한 적이 있는지 되돌아보았다.
두 번째, 분노는 그 단일 사건에 대한 감정 상태인 경우가 많으나, 울분은 이전의 감정들도 누적이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억울함이 축적된 것이다.
돌이켜보니 내가 살아오면서 한 행동들은 짜증이나 울분에 가까웠다. 답답하고 분한 상태! 마음껏 내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갑갑함과 억울함이 더해져 나는 '울분'했던 것이다.
그럼 나를 울분하게 한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성인이 되어서는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몇 가지 것들이 떠오른다.
1남 4녀 중 서열 4위, 아래로 남동생을 둔 막내딸인 나는, 다섯 형제 중 가장 부끄러움이 많았다. 우리는 전부 두 살 터울인데 밖에서 같이 놀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너무도 활동적이었던 언니들은 각자 또래들과 노느라 늘 집에 없었고, 나는 동네 친구 한두 명과 소소하게 놀던 얌전한 아이였다. 집 안에서도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하하 호호 했던 언니들과는 달리, 나는 누가 챙겨주고 물어봐 주면 그제야 내 의견을 말했었다.
외동도 아니고 형제가 다섯이나 되는 정글 같은 약육강식의 환경에서 나는 태생적으로 불리한 성격을 타고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별것 아닌 사소한 일들이, 나의 억울함의 시작이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간식이 귀하던 어린 시절, 과일을 먹을 때 우리끼리는 각자 몇 개씩만 먹자고 얘기하곤 했었다. 엄마는 모르는 우리끼리의 규칙이었다. 하지만 과일을 유독 좋아하는 셋째 언니는 항상 우리 모르게 뒤 호주머니에 과일 한두 개를 숨기고 밖으로 도망치듯 나가 놀았다.
내가 그 장면을 봤던 못 봤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왕 먹은 거니 그건 그냥 퉁쳐지는 것이다. 융통성 없고 규칙을 잘 지켰던 나는 먹고 싶어도 참고 견뎠는데, 부엌을 오가며 도대체 몇 개나 더 먹었는지 가늠조차 안되는 언니에게는 어떠한 추궁도 꾸지람도 없어 난 늘 억울했었다. 언니에게 따지고 들면, '니도 먹어라'하고 쿨하게 말하는 언니에게 맞받아칠 말이 없어 더 얄밉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언니의 이런 행각은 크면서도 종종 있었고, 성인이 되어 먹을거리가 넉넉해질 때쯤, 나도 더는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 시절 딸 부잣집은 으레 옷 때문에 싸우지 않은 집이 없었고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침마다 누군가는 어젯밤에 찜한 옷을 누군지 먼저 입고 갔다며 화를 내고 분해했다. 속옷이든, 양말이든 같이 입었던 그 시절엔 먼저 입고 나가는 사람이 임자였으니, 등교를 제일 먼저 하는 언니들이 항상 유리했다.
가끔 전날 밤, 내일 입고 갈 옷을 숨겨 놓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나란히 잠자리에 누워서까지 옥신각신 말싸움은 끝날 줄 몰랐다.
넷째 딸이다 보니 새 옷을 산 기억이 거의 없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가 작정하고 사주셨던 백바지와 연두색 체크 남방이 생각난다. 늘 헌 옷만 입던 나는, 보기에도 간지가 흐르는 옷을 몇 번이나 입어 보고는 얼른 명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호기심이 남달랐던 셋째 언니가 나의 옷을 입고 가족들 앞에 짠하고 나타난 것이다. '어때? 내가 더 잘 어울리지 않아?'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 나와 달리, 키도 크고 피부도 하얗던 언니는 누가 봐도 옷이 잘 어울렸다.
나는 처음으로 산 내 명절 옷을 자기 마음대로 입고 식구들한테 자랑하는 언니의 당당함도, 나보다 더 잘 어울리는 옷발에도 화가 났지만, 단지 벗어라고 한 마디 하는 것 말고는 나의 울분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옷에 관한한 자라면서 비슷한 일들이 꽤 자주, 일어나 유독 셋째 언니에 대한 감정이 쌓였던 것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아파트에 살며 누구보다 나를 챙겨주는 제일 살갑고 고마운 언니다. ^^
성인이 되고서는 나는 가끔 분노를 표출하는 삶을 살았다. 어릴 때처럼 가슴에 묻어두고 눈물만 삼키던 아이는, 표현 방법이 서툴고 세련되진 못했지만 밟으면 꿈틀대며 아프다고,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처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IMF 시절, 툭하면 우리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던 거래처 상사에게 담배 피우지 말라고 소리치다 욕을 듣기도 했지만, 나는 분노를 표출했고 이후 그분은 두 번 다시 우리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울분이 아닌 '분노'를 표현한 용감했던 시절을 시작으로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순탄하지 않았던 사회생활은 자연스레 나를 가끔 분노케 했고, 아이 등굣길 교통지도할 때 횡단보도에 무단 주차한 아저씨가 나더러 유별나다며 더 큰소리를 칠 때도 같이 고함치게 했다.
이십 년 넘게 사회생활을 해 오며 만났던 사람들과 누구보다 원만한 관계였음을 자부할 수 있으나, 간혹 분노를 자아내는 사람들(왜 항상 그 사람들은 나의 상사인지)한테는 참을 수가 없었다.
몇 해 전 울분도 분노도 아닌, 단지 상사의 부당한 행동에 대한 나의 의견을 얘기했다가 몇 번을 불려 다니며, 기어이 마음에도 없는 나의 경솔함을 사과해야 했다. 그건 일종의 타협이었다. 어린 시절 가족에 대한 울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분노로 바뀌었고, 이제는 가끔 타협으로 분노를 삭혀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내 속에 울분과 분노가 사라진 건 아니다. 여전히 나를 표현하는 주요한 감정들 중의 하나이고 내가 잘 다스려야 하는 것들이다. 이런 감정들은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기에 나의 그것들과 잘 타협하려 하지만 아직도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이유를 갱년기에 갖다 대기엔 아직 궁색해 보인다.
지난 이십여 년간의 잦은 분노 표출이 화로 습관화가 된 것처럼 여전히 화를 다스리는 게 쉽지 않다. 얼마 전 명상 전문가인 나의 지인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니, 간단한 처방을 내려준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게 인지가 되면 바로 표출하지 말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명치를 두드리며 화를 다스리라 한다. 만약 위로 발산하게 되면 두피의 열감으로 머리카락도 빠지고, 얼굴도 붉어지는 등 부작용이 한 둘이 아니다. 울분도 분노도 아닌, 이제는 적당한 감정의 타협으로 따뜻한 물 한 모금과 함께 나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