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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노트 Aug 25. 2023

내 인생의 분노와 울분에 대하여..


글을 쓰다 보면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들여다볼 일이 예전보다 많아진다.

아마도 쓰기가 나로부터 출발하다 보니 나의 감정을 들여다볼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을 감정으로 나타낸다면 무슨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불안, 성급, 정의, 소심, 유머, 화(분노)

짜증, 걱정, 공감, 소통, 의리, 따뜻함..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불안이다. 그리고 이어져 나오는 것들도 썩 유쾌하지 못한 감정들로 대략 훑어봐도 부정적인 것들이 많다. 얼마 전 '불안'에 대한 내 감정에 대해 들여다보았을 때, 그 안에 있는 욕심이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극복되지 못하는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나의 욕심 말이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내 마음 깊숙이 자리하여 평생을 따라다닌 감정, '분노'에 대해, 도대체 어디서부터 였는지 알아볼 참인데,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울분'도 같이 들여다보았다. 


이 두 단어의 미묘한 차이가 궁금하여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정의해 준다. 






그런데 두 단어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내가 이제껏 느꼈던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울분'에 가까운 것임을 알게 되었고, 내가 느끼는 두 단어의 차이점도 보였다. 










첫째,  분노한다는 것은 '분개하여 몹시 화를 내는 것'으로, 이렇게 표현하려면 기본적으로 '용기와 배짱'이 필요함을 나는 직관적으로 안다. 소심한 나로서는 남들 앞에서 분노한 적이 있는지 되돌아보았다.


두 번째, 분노는 그 단일 사건에 대한 감정 상태인 경우가 많으나, 울분은 이전의 감정들도 누적이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억울함이 축적된 것이다. 

돌이켜보니 내가 살아오면서 한 행동들은 짜증이나 울분에 가까웠다. 답답하고 분한 상태! 마음껏 내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갑갑함과 억울함이 더해져 나는 '울분'했던 것이다. 

그럼 나를 울분하게 한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성인이 되어서는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몇 가지 것들이 떠오른다. 


1남 4녀 중 서열 4위, 아래로 남동생을 둔 막내딸인 나는, 다섯 형제 중 가장 부끄러움이 많았다. 우리는 전부 두 살 터울인데 밖에서 같이 놀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너무도 활동적이었던 언니들은 각자 또래들과 노느라 늘 집에 없었고, 나는 동네 친구 한두 명과 소소하게 놀던 얌전한 아이였다. 집 안에서도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하하 호호 했던 언니들과는 달리, 나는 누가 챙겨주고 물어봐 주면 그제야 내 의견을 말했었다. 


외동도 아니고 형제가 다섯이나 되는 정글 같은 약육강식의 환경에서 나는 태생적으로 불리한 성격을 타고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별것 아닌 사소한 일들이, 나의 억울함의 시작이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간식이 귀하던 어린 시절, 과일을 먹을 때 우리끼리는 각자 몇 개씩만 먹자고 얘기하곤 했었다. 엄마는 모르는 우리끼리의 규칙이었다. 하지만 과일을 유독 좋아하는 셋째 언니는 항상 우리 모르게 뒤 호주머니에 과일 한두 개를 숨기고 밖으로 도망치듯 나가 놀았다.  


내가 그 장면을 봤던 못 봤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왕 먹은 거니 그건 그냥 퉁쳐지는 것이다. 융통성 없고 규칙을 잘 지켰던 나는 먹고 싶어도 참고 견뎠는데, 부엌을 오가며 도대체 몇 개나 더 먹었는지 가늠조차 안되는 언니에게는 어떠한 추궁도 꾸지람도 없어 난 늘 억울했었다. 언니에게 따지고 들면, '니도 먹어라'하고 쿨하게 말하는 언니에게 맞받아칠 말이 없어 더 얄밉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언니의 이런 행각은 크면서도 종종 있었고, 성인이 되어 먹을거리가 넉넉해질 때쯤, 나도 더는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 시절 딸 부잣집은 으레 옷 때문에 싸우지 않은 집이 없었고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침마다 누군가는 어젯밤에 찜한 옷을 누군지 먼저 입고 갔다며 화를 내고 분해했다. 속옷이든, 양말이든 같이 입었던 그 시절엔 먼저 입고 나가는 사람이 임자였으니, 등교를 제일 먼저 하는 언니들이 항상 유리했다. 


가끔 전날 밤, 내일 입고 갈 옷을 숨겨 놓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나란히 잠자리에 누워서까지 옥신각신 말싸움은 끝날 줄 몰랐다.  







넷째  딸이다 보니 새 옷을 산 기억이 거의 없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가 작정하고 사주셨던 백바지와 연두색 체크 남방이 생각난다.  늘 헌 옷만 입던 나는, 보기에도 간지가 흐르는 옷을 몇 번이나 입어 보고는 얼른 명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호기심이 남달랐던 셋째 언니가 나의 옷을 입고 가족들 앞에 짠하고 나타난 것이다. '어때? 내가 더 잘 어울리지 않아?'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 나와 달리, 키도 크고 피부도 하얗던 언니는 누가 봐도 옷이 잘 어울렸다. 


나는 처음으로 산 내 명절 옷을 자기 마음대로 입고 식구들한테 자랑하는 언니의 당당함도, 나보다 더 잘 어울리는 옷발에도 화가 났지만, 단지 벗어라고 한 마디 하는 것 말고는 나의 울분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옷에 관한한 자라면서 비슷한 일들이 꽤 자주, 일어나 유독 셋째 언니에 대한 감정이 쌓였던 것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아파트에 살며 누구보다 나를 챙겨주는 제일 살갑고 고마운 언니다. ^^



성인이 되고서는 나는 가끔 분노를 표출하는 삶을 살았다. 어릴 때처럼 가슴에 묻어두고 눈물만 삼키던 아이는, 표현 방법이 서툴고 세련되진 못했지만 밟으면 꿈틀대며 아프다고,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처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IMF 시절, 툭하면 우리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던 거래처 상사에게 담배 피우지 말라고 소리치다 욕을 듣기도 했지만, 나는 분노를 표출했고 이후 그분은 두 번 다시 우리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울분이 아닌 '분노'를 표현한 용감했던 시절을 시작으로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순탄하지 않았던 사회생활은 자연스레 나를 가끔 분노케 했고, 아이 등굣길 교통지도할 때 횡단보도에 무단 주차한 아저씨가 나더러 유별나다며 더 큰소리를 칠 때도 같이 고함치게 했다. 

이십 년 넘게 사회생활을 해 오며 만났던 사람들과 누구보다 원만한 관계였음을 자부할 수 있으나, 간혹 분노를 자아내는 사람들(왜 항상 그 사람들은 나의 상사인지)한테는 참을 수가 없었다. 


몇 해 전 울분도 분노도 아닌, 단지 상사의 부당한 행동에 대한 나의 의견을 얘기했다가 몇 번을 불려 다니며, 기어이 마음에도 없는 나의 경솔함을 사과해야 했다. 그건 일종의 타협이었다. 어린 시절 가족에 대한 울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분노로 바뀌었고, 이제는 가끔 타협으로 분노를 삭혀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내 속에 울분과 분노가 사라진 건 아니다. 여전히 나를 표현하는 주요한 감정들 중의 하나이고 내가 잘 다스려야 하는 것들이다. 이런 감정들은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기에 나의 그것들과 잘 타협하려 하지만 아직도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이유를 갱년기에 갖다 대기엔 아직 궁색해 보인다. 


지난 이십여 년간의 잦은 분노 표출이 화로 습관화가 된 것처럼 여전히 화를 다스리는 게 쉽지 않다. 얼마 전 명상 전문가인 나의 지인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니, 간단한 처방을 내려준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게 인지가 되면 바로 표출하지 말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명치를 두드리며 화를 다스리라 한다. 만약 위로 발산하게 되면 두피의 열감으로 머리카락도 빠지고, 얼굴도 붉어지는 등 부작용이 한 둘이 아니다. 울분도 분노도 아닌, 이제는 적당한 감정의 타협으로 따뜻한 물 한 모금과 함께 나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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