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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돈으로 말하고, 국민은 신뢰로 대답한다

싱가포르에서 배운 것들

by Flying Angie

서울에서 싱가포르로 이사 온 지 1년이 되던 날, MRT 개찰구 앞에서 멈춰 섰다. 실물 카드 없이 지하철을 타려다 허둥댔고, 앱도 안 되고, 등록한 카드도 인식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생각도 못 했던 불편함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이 나라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가 쌓였기 때문일까.

며칠 전 우연히 본 인포그래픽에서 싱가포르 총리의 연봉이 160만 달러(약 22억 원)에 이른다는 걸 봤다. 미국 대통령보다 4배, 독일 총리보다 5배 가까이 높았다. 처음엔 “이 정도면 기업 CEO도 울고 가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그래프는 좀 놀라웠다.


2023년 기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청렴한 나라’가 싱가포르였다. 덴마크, 핀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다음 순위. 부패인식지수(CPI) 83점. 한국은 63점으로 32위에 머물러 있었다. 무려 20 계단 차이다.


‘돈을 많이 주니까 정직하다’는 말이 처음엔 꺼림칙했다. 그러나 살아보니, ‘정직하게 일하면 정당하게 보상받는다’는 믿음이 이 사회에 깊숙이 스며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고위직은 고액 연봉을 받되, 그만큼 성과와 투명성으로 국민에게 응답해야 한다는 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다. 높은 연봉이 탐욕의 상징이 아닌, 청렴과 책임의 보증서가 되는 나라. 싱가포르는 그런 곳이었다.


한국에서 정치 뉴스는 보통 분노와 체념을 불러왔다. ‘누가 얼마나 해 먹었는지’, ‘이번엔 어느 고위 공직자가 무슨 땅을 샀는지’ 같은 이야기들. 하지만 싱가포르에서는 ‘공직자들이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조심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다. 신뢰가 일상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지하철에서 잃어버린카드의 잔액이 안타깝긴 했지만, 누군가가 그걸 악용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싱가포르도 완벽한 사회는 아니다. 하지만 이곳은신뢰가 제도보다 앞설 수 있다는 희귀한 경험을 하게 해 준다. 이 나라가 보여주는 투명성과 보상 사이의 균형은, 우리 사회가 언젠가 닮고 싶은 모델이 아닐까.


MRT에서 실수로 빠져나온 내가 다시 개찰구 앞에 선다. 다음 열차가 온다. 이번엔 제대로 ‘삑’ 하고 통과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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