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릇노릇한 사랑

by KJ



푸른 바다는 점잖은 듯이 잔잔하기만 한데 큰 배가 지나간 자리에는 보글거리는 하얀 거품이 장난꾸러기처럼 자꾸만 생겼어요. 그걸 보는 게 재미있어서 갑판 위 난간대를 꼭 붙들고 머리를 집어넣어 아래를 내려다보았어요. 계속 아래만 보고 있느라 속이 메스꺼워질 때 즈음이 되면, 저 멀리 작은 섬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이 보였어요. 아주 작은 바닷가 마을인데요, 배가 선착장에 닿지 않아도 우리 할머니 집을 찾을 수 있답니다. 저기 언덕 위에 하얀색 큰 십자가 있는 곳이 성당이고요, 그 옆길에 있는 첫 번째 집이요. 주황색 지붕이 눈에 띄는 저 집이 바로 우리 할머니 집이에요. 할머니 집 담벼락은 낮은데, 우리 할머니는 허리가 곧고 키가 크시거든요. 그래서 담벼락 위로 할머니가 보이나 찾아보았어요.


도착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나면 할머니는 담벼락 너머로 배가 어디까지 왔나 지켜보다가 멀리서 날 보고는 뛰어나왔어요. 그러면 백구도 할머니를 따라서 꼬리를 흔들며 쫓아 나와요. 누가 오는지도 모르면서 꼬리부터 요란스럽게 흔드는 걸 보면 집은 어떻게 지키려나 몰라요.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에 성당 앞마당 즈음에만 와도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어요. 그럼 다 온 거예요. 할머니 집까지는 기차도 타야 하고 배도 타야 해서 아주 멀고 고단해요. 그래서 방학 때마다 오래오래 있으려고 짐을 아주 많이 챙겨서 와야 하거든요. 드디어 도착이에요. 야호 할머니 집에 다 왔다!


짐가방은 아무렇게나 패대기쳐놓고 냅다 평상에 누웠어요. 눈을 꼭 감고 숨을 크게 쉬어봐요. 하아- 우리 할머니 집 냄새, 바다 냄새,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떠 봤어요. 저 하늘이 보이나요? 할머니 집 평상에 누워야만 보이는 저 하늘은 내가 그네 타면서 올려다보던 하늘이랑은 달라요. 저 하늘이 참 그리웠어요. 푸른 바다만큼 파아란 하늘에 내가 좋아하는 흰 구름이 장난꾸러기 거품처럼 몽글몽글하게 떠다니고 있었어요. 아주 파랗고 아주 깨끗한 저 하늘이 서울에선 애가 타게 그리웠어요. 눈에 띄는 주황색 지붕이랑, 바람 솔솔 부는 시원한 평상도 말이에요. 그중 제일 그리웠던 건 바로 우리 할머니랍니다. 내가 우리 할머니를 너무너무 좋아하거든요. 할머니는 달 지난 달력 뜯어다가 뒷장에 새들을 그려서 내게 주셨어요. 그러면 갈매기랑 제비는 비행기 접어 날리고요, 오리는 배 만들어 빨간 다라이에 띄워 놀던 게 나의 어린 시절이었어요.

할머니 옷장을 뒤적여서 할머니가 새로 산 꽃무늬 치마를 찾았어요. 긴치마를 가슴께까지 올려 입고 나면 할머니의 꽃신을 신고 앞마당을 걸었어요. 할머니처럼 말이에요. 키도 크고 다리도 늘씬한 우리 할머니는 젊었을 때는 더 예뻤대요. 밭에 나가 하도 일을 해서 많이 새까매졌는데요, 그래도 항상 곱게 꾸미는 우리 할머니가 너무 좋았어요.

밥 냄새 맡으니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어요. 냄새만 맡아도 홍합탕이랑 계란말이, 그리고 생선구이가 내 점심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밥상을 다 차리면 할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평상 위로 들고 와주세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쓰던 작은 숟가락이 놓여있는데요, 내 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에 나만 쓰는 그 숟가락이 참 귀엽고 좋았어요. 홍합 껍데기 한쪽 떼다가 다른 쪽 긁어서 오동통한 살만 속 골라 먹고 껍데기로 국물 떠서 한 입 먹으면요, 국물이 진한 게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요. 달콤하고 부들부들 한 맛이 특별한 할머니의 계란말이는 내가 어릴 때부터 제일 좋아하던 반찬이에요. 그리고 바닷가 마을에서 먹는 생선구이는 비늘 때깔부터 다르다 이 말입니다.

평상에 앉아 할머니가 숟가락 위에 올려주는 사랑을 받아먹고 있으면요, 지나가던 이웃 할머니들이 인사해 주러 와서는 말린 생선도 주고 가고 주전부리도 주고 가세요. 이 섬마을에서는 내가 우리 할머니 손녀인지, 우리 엄마 딸인지 다 알아요. 내 얼굴이 우리 엄마 어릴 때랑 똑 닮았대요. 그래서 슈퍼 할아버지는 우리랑 먼 친척이라는데요, 내가 과자 사러 가면 우리 엄마 딸이라고 돈도 안 받았어요.

밥 다 먹고 나서 먹는 옥수수는 배가 아주 부를 때, 한 알씩 뜯어먹어야 제맛이거든요. 나는 가로로 빙 둘러서 한 줄을 파먹을지, 세로로 길게 한 줄을 파서 먹을지 고민하는 순간을 즐겼어요. 기술을 조금 더 쓰면 체크무늬 옥수수로도 만들 수 있답니다. 이 옥수수는 우리 할머니가 나 주려고 바닷가 땡볕을 버티면서 농사지은 거라서 알맹이 하나하나가 엄청 소중했어요. 나 더 어렸을 적에 엄마 지갑에서 동전 꺼내 혼자 옥수수 사 먹으러 나갔던 날, 내가 없어진 줄 알고 난리가 났었거든요. 다들 옥수수만 보면 그렇게 내 생각이 난대요. 그래서 나 주려고 옥수수 농사 많이 지어서 큰 냄비에 한 솥 쪄 두셨어요.

내가 야금야금 뜯어먹는 노란 옥수수를 백구도 먹고 싶은지 평상 위로 올라오고 싶어서 낑낑거리는데 아직 새끼라 어림도 없어요. 추운 겨울에 태어났는데요, 그때 어미가 젖이 안 나와서 우리 엄마랑 나랑 분유 가루 타 먹이면서 살린 새끼 백구예요. 어미젖을 못 먹어서 그런가 크는 게 느린 것 같아요. 손바닥만 하던 게 이제 축구공만 하게 컸거든요. 다음 방학 때 오면 제법 커 있을까요? 어미는 큰 진돗개거든요. 얼른 커서 우리 할머니 지켜줘야 하니까 옥수수 몇 개 더 꺼내 와서 나눠 먹어요.

백구가 냠냠거리는 소리를 들은 고양이들이 먹이 주는 줄 알고 담을 넘어서 살금살금 내려와요. 할머니는 밥 먹으러 왔냐면서 구운 생선을 나눠줘요. 그러고도 배고프다고 안 가면 불려둔 멸치도 아낌없이 내어줬어요. 나도 밥 준다고 밥그릇을 내밀어보면 백구는 옥수수 몇 알에도 내게 온몸을 내어주는데요, 고양이들은 내가 밥을 방학 끝나갈 때까지 줘도 털끝 하나 못 만지게 해요. 나는 우리 집 소속인 백구가 더 좋은데, 우리 할머니는 무소속인 고양이들도 예쁘다고 돌봐줬어요. 그래서인지 할머니네 집 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고양이들을 가끔 보는데요. 할머니가 아는 척을 하면 고양이들이 “야옹-” 하고 대답을 하고 가요. 정말 신기해요. 그리고 하얀색도 노란색도 얼루기도 검은색도 다 나비라고 부르는 것도요.

할머니 집은 내게도, 백구랑 나비들한테도 참 따수웠어요. 방바닥도 얼마나 따수운지 겨울에는 자다가 등짝이 뜨거워서 일어난 적도 있거든요, 등짝도 마음도 너무 따수워져서 방학이 시작하면 짐 잔뜩 싸 들고 먼 길을 온답니다. 여름엔 평상에 누워서 별도 보고 바람도 느끼다 보면 모기가 꼭 나만 물었어요. 할머니 피는 맛이 없어서 안 문대요. 그러면 우리 할머니는 모기가 물어 부푼 내 살을 십자가 모양내서 손톱으로 살살 눌러주셨어요. 내가 잠들 때까지요. 잠들랑 말랑하던 그때 참 기분이 좋았어요.

나는요 옥수수만 봐도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나고요. 어디서 계란말이만 먹으면 목이 메어와요. 바닷가 마을에 안 가본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눈을 감으면 그 집이 다 그려질 듯이 생각이 나거든요. 그런데 기억이 안 나는 건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도 도저히 기억이 안 나서 화딱지도 났다가 결국은 슬퍼질 때가 있어요. 그게 뭐냐면요, 우리 할머니 손이에요. 우리 할머니는 얼굴은 고운데 일을 하도 많이 해서 손이 미웠어요. 손잡으면 거칠고 두툼했거든요. 나는 우리 할머니 손 잊어버리면 큰일 나요.


우리 할머니가 그랬는데요, 전쟁 나서 피난길에 가족들이 헤어졌어도, 세월이 많이 흘러서 어릴 때 모습이 다 사라져 버려도, 잡은 손의 느낌을 잊지 않으면 서로 알아볼 수 있대요. 그 느낌으로 가족을 찾을 수 있다고 했거든요. 나는 할머니 손 내가 제일 많이 잡아봤으니까 단번에 알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우리 할머니 손이 얼마나 투박했는지 얼마나 거칠었는지 머릿속에 떠오를 듯 말 듯해요. 자꾸 따뜻했던 것만 생각나서 큰일이에요. 진짜로 딱 한 번만 잡아 보면 생각이 날 것 같아서 막 답답하고 그렇거든요. 그럴 때는 눈을 감고 상상이라도 해봐요.

우리 할머니 내가 잊지 않고 살다가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요, 그때는 나도 할머니가 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시간이 많이 흐른 탓에 기억이 가물가물해도 손 내밀어 꼭 잡아 보면 서로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머리로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아마도 내 손이 기억하고 있을 것 같거든요. 우리 할머니하고 나하고 다시 만나면요, 그때는 나 좋아하는 거 말고 우리 할머니가 좋아하는 거 호박잎쌈하고, 홍합살하고 땡초넣은 정구지 지짐 바삭하게 부쳐서 같이 먹을 거예요. 그래도 할머니가 구워준 노릇노릇한 계란말이는 다시 한번 먹어보고 싶어요. 잘 구운 계란말이는요, 노릇노릇한 사랑이거든요. 나 그 계란말이 한 입 먹으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