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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들 May 06. 2021

#1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마네킹

첫 만남




 남편을 처음 만난 건 언어교환 모임에서였다. 당시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의 삶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게으름을 피우다 저녁에 언어교환 모임에 가서 수다를 떠는 게 그 당시 나의 유일한 낙이었다.


 내가 가는 모임은 한국인 외에도 외국인들이 제법 오는 모임이었다.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 이동한 것뿐인데 여행으로 잠시 한국을 방문한 사람부터 한국에 정착하고 싶어 하는 사람까지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소설가도 있었고 대사관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전엔 국내에서 외국인을 보는 것 자체가 힘들었는데 이제는 스스로 한국에 찾아와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에 살려는 외국인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세상 참 많이 변했구나 싶었다.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건 꽤 흥미로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다 재미있을 수는 없는 법. 그 날은 유난히도 재미없는 사람들과 한 테이블에 배정이 되었다. 모임 규정상 일정 시간 동안은 자리도 뜨지 못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척하고 있었는데 저 구석에서 있는 하얀 마네킹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은 새하얗고 얼굴에 미소를 띤, 안경 낀 마네킹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곳에 마네킹이 있을 리가 없다. 다시 보니 사람인 거 같은데 진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하얗고 움직임도 없었다. 나는 저 마네킹이 정말 사람인지가 궁금해졌다. 테이블을 옮길 수 있는 시간이 되자 나는 과감하게 마네킹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나 : 하이! 웨어 알유 프롬?
마네킹 : 하이. 암 프롬 아메리카!


 오. 마네킹은 아니었군. 마네킹이 있는 테이블에는 안경 낀 한국 남자가 2명 더 앉아 있었는데 둘 다 굉장히 똘똘하게 생긴 똘똘이 스머프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마네킹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까?


나 : 아, 무슨 얘기들 하고 있었어요?(영어로 얘기함)


마네킹 : 엄... 우리는 한국인들이 왜

판타지 소설을 많이 안 쓰고 안 읽는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어요.  두유 라잌 판타지 노블?


나 : 아...


 

 나는 반지의 제왕을 한 번도 끝까지 본 적이 없고  책을 수면제 대신 복용하는 사람이다. 그 둘을 합친 판타지 소설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여기도 아닌 거 같아 바로 작별을 고하고 싶었으나 이미 통성명도 했고 너무 매너 없어 보일 것 같아 예의상 잠시만 앉아있기로 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는 한국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전공은 문학과 교육. 그래서 책을 좋아하는구나. 그럼 한국 소설도 읽어봤으려나? 하는 호기심에 질문을 던져보았다.


나 : 한국소설도 읽어본 적 있어요?


마네킹 : 당연하죠!

난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어봤어요. 김영하는 아주 훌륭한 작가예요.



 김영하를 안다고? 갑자기 마네킹이, 아니 사람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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