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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들 May 08. 2021

#2 김영하와 마네킹

3일의 법칙

 



 책을 수면제 대신 복용하는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소설가는 김영하이다. 안타깝게도 소설을 읽고 팬이   아니고 라디오를 듣고 팬이  케이스다. 예전에 가수 이적이 진행하는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김영하 작가가 코너를 맡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여고생이었던 나는  목소리 좋고 스마트한 남자는 누구지??’ 하고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목소리 좋고 똑똑한 남자가  책이라면 분명 엄청나게 멋진 글일 거야 라고 생각한 나는 그의 대표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읽기 시작했다. ‘차분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도발적인 제목이군이라고 생각하며 읽어나간  소설은 라디오에서 느껴졌던 젠틀함은 온데간데 없고 어둡고 ‘성애가 진한문장들로 가득했다. 아직  묻지 않은 순수한 여고생이었던 나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웠다. 솔직히 뭐야 작가 변태 아냐?’라고도 생각했다. 나는 에이 그냥 라디오나 들어야겠다 하며 책을 덮었다. 라디오는 여전히 재밌었다.


 그런데  금발의 마네킹이, 아니 외국인이 김영하 작가를 안다고? 김영하는 나에게 치트키와도 같았다. 김영하 작가에 대해서 뭐가 좋았는지  깊이 얘기해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마네킹남은 주제를 다시 판타지 소설로 돌려 안경  똘똘이 스머프  사람과 신나게 떠들었다. 아니 난 판타지말고 김영하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고 싶다고!! 판타지의 ㅍ도 모르는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자리에 앉아 었다. 그 때 모임 종료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영하에 대해  얘기하지 못한  아쉬웠지만 어쩔  다고 생각하며 일어나려던 찰나 마네킹남이  번호를 물어봤다. 다음에  모여서  같이 얘기를 하자나? 난 너네랑 판타지 소설에 대해서 얘기할 생각이 없는데? 그래도 나만 연락처를 안주기 뭐해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Three Days Rule


 미국에는 ‘Three Days Rule’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남자가 여자의 번호를 따면 무슨 일이 있어도 3일은  참고 기다렸다 연락해야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일종의 데이트 룰인데, 마네킹남은 모임에서 나오고 5 만에 ‘ 들어가카톡을 보내왔다. 나중에 들어보니 남편도 아무 생각없이 보낸 톡이었다고 한다. 정말 잘해보고 싶은 여자였다면 3일의 법칙을 지켰겠지.  생각 없이 영어 연습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답장을 보냈고, 피차 별 생각 없던 우리는 그날 잠들기 직전까지 별 시덥지 않은 카톡을 나누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마네킹 : 굿모닝. 잘 잤어?


 정확히 다음 날 아침 7:30에 굿모닝 톡이 도착한 것이다.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뭐야 지가 벌써 내 남친이야 뭐야. 내가 어제 카톡을 너무 친절하게 답장해줬나? 아니면 미국 사람들은 원래 다 이런가? 내가 만만해 보이나? 아님 얘그냥 심심한 건가?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던 나는 아무래도 좀 거리를 둬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날 오후 느지막이 답장을 했다.


 그 날 저녁 나는 친구와 술 약속이 있었다. 화장도 좀 하고 예쁘게 꽃단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만 친구가 직전에 파토를 내고 말았다. 이미 나갈 채비를 다 마친 나는 짜증이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때 마침 마네킹남으로부터 또 카톡이 도착했다.


마네킹 : 안녕, 오늘은 뭐해요?
나 : ... 약속 있었는데 방금 파토났어요...
마네킹 : 그래요? 그럼 오늘 나랑 만날래요? 나도 할 일 없는데.


 너 우리 집에 CCTV 설치해놨니?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카톡을 할 수 있지? 기껏 한 화장을 아까웠던 나는 누구라도 만나야 덜 억울할 것 같아 결국 마네킹남과 강남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게 우리의 첫 번째 데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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