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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들 May 10. 2021

#3 심심함과 약간의 타이밍

첫 데이트

 



 그 날 우리는 강남역에 위치한 바에서 컵에 설탕이 묻은 코젤을 마셨다. 흑맥주는 별로지만 달달한 설탕과 함께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김영하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판타지 소설에 대해서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사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내 이야기를 듣던 그의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의 미천한 영어를 그는 참 인내심 있게 들었다. 중간에 말을 끊거나 지레짐작해서 말을 가로채는 일도 없었고 지루해하거나 가식적인 오버 액션도 없었다. 그저 온화한 미소로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여가며 내 이야기를 듣던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상대방이 내 이야기를 정말 제대로 들었는지 알려면 내 이야기가 끝난 후 상대방이 어떤 질문을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전개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가끔 내가 A에 대해서 실컷 이야기했는데 내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B라는 주제로 화제를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얘기하는 내내 내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딴생각을 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리고 난 그런 사람들이 싫다.


 그는 달변가라던가 엄청난 미남이라던가 배꼽이 빠질 정도로 재밌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한 번쯤 더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달달한 코젤과 그 온화한 미소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 평생의 반려자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모국어가 다른 사람과의 결혼은 절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앞 일은 정말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번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는 당시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친구도 별로 없고 만나는 사람도 없었기에 너무 너무 심심한 나머지 나를 만났다고 했다. 굿모닝 톡을 보낼 때에도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날 코젤을 마시며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나를 보니 귀엽고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첫 눈은 아니고 두 번째 눈에 반한 셈이다. 아무런 기대감 없이 나왔는데 의외로 재밌으니 효과가 배가 된 게 아닐까?


 생각해보면 나도 이때까지 기대 안 하고 나간 소개팅이 결과가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떨려서 말도 잘 못하고 덜덜 떨기만 하는데 그 날은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아주 편안하게 떠들 수 있었던 것 같다.


 심심함과 노관심과 약간의 타이밍이 우리의 연애 레시피였다. 아 그리고 코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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