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의 ‘첫 기억’

by Bell

능소화를 보면 오래전 다녔던 전 직장이 떠오른다. 회사 뒤쪽으로 주택가가 형성돼 있었는데 점심을 먹고 그 길을 자주 걸었다. 드문드문 가게가 있었지만 번잡하지도, 변화가 많지도 않았는데 그 한적함을 좋아했다.


봄이면 햇빛 쬐라고 내놓은 화분에 새싹이 돋아 있었고, 여름이면 벌컥 열어둔 문 사이로 두런두런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을엔 말리려고 내놓은 빨래와 먹을거리가 바스락거렸고, 겨울이면 꽁꽁 닫힌 문 사이로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것들로 직장생활의 고단함을 위로받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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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멀리서도 환한 풍경을 보았다. 오래된 벽돌집에 노란 전구를 닮은 능소화가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마치 만개한 능소화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집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는데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아직까지 그 어떤 능소화로도 대신할 수 없는 ‘첫 기억’이다.


올해는 두 번의 능소화를 보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친절했던 타인과 함께.

한 번은 그 앞에서 사진도 찍었는데 그 사진을 다시 보며 알게 되었다. 능소화의 ‘첫 기억’이 능소화를 좋아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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