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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원 Aug 23. 2024

일본 경찰도 막지 못한 봉화 시위

역사 한 스푼 5 - 원주의 3·1운동⑤

3·1운동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자 조선 총독부는 진압을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경찰과 군인은 물론 철도 원호대, 소방대를 동원했고 심지어는 일본인 폭력배들까지 동원해서 비무장 시위대를 무차별 진압했다.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맞선 시위 군중의 대응 방식도 다양해졌다. 평화적 시위가 아닌 폭력적  방법으로 맞서 저항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고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따른 희생자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나타난 대응이었다. 시위대는 만세를 부르며 일제가 장악하고 있는 경찰서나 면사무소 등 관공서를 습격했다. 원주의 경우 소초면과 흥업면 시위 군중은 소초면사무소와 흥업면사무소를 에워싸고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또 다른 방식은 일제의 탄압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운 곳으로 이동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것이었다. 마을을 둘러싼 산꼭대기에 수십 명씩 나누어 올라가 만세 시위를 전개하고, 깜깜한 밤중에 봉화를 피워 올리고 시위를 전개하는 방식이었다. 귀래면, 지정면, 건등면(문막), 부론면 등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이 이런 유형이었다.

    

국가보훈부 공훈록 자료


부론면 법천리 만세운동이 처음 계획된 것은 3월 말이었다. 배재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근성은 부론에서 이근원, 정우진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거사를 함께할 사람들의 명부를 작성했다. 그런데 헌병 보조원이 명부 작성 사실을 알아채고 이근성의 집에 와서 추궁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이근성의 부친은 명부를 빼앗기지 않으려 화로에 넣어 태워버렸다. 명부를 압수하지 못한 헌병 보조원은 화가 나서 이근성을 체포했다. 이근성은 끌려가 태형 60대를 맞고 돌아와 4개월간 요양했고 3월 말 만세운동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3.1 운동 당시 봉화시위가 전개되었던 문막읍 궁촌리

   

4월 8일 이웃해 있는 지정면과 건등면(문막) 일대에 봉화 시위가 전개되었다. 지정면 안창리에서 흥법, 월운, 창말의 뒷산에서 수십 명씩 산에 올라 봉화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건등면(문막)에서도 마을의 산마다 봉화가 오르고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문막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봉화시위였다. 건등면 매사동과 동화동 뒷산에서도 수십 명씩 모여 봉화 시위가 전개되었고, 궁촌에서도 50~60명의 주민들이 언덕에 모여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지정면과 건등면의 봉화 시위 소식에 영향을 받아 법천리에서도 4월 9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표광천과 지천복은 마을 사람 수십 명과 함께 법천리 응봉산 정상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봉화 시위를 전개했다. 손곡리에서도 4월 11일 밤 김복기, 정완용, 이은교와 서당 훈장 이재관이 계획하여 마을 주민 수십 명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봉화 시위를 전개했다.

    

지정면, 건등면, 부론면 등지에서 전개된 봉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 헌병과 보조원들은 각 마을을 찾아다니며 저지했지만 산봉우리마다 피어오르는 봉화 시위를 막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봉화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은 이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봉화 시위가 전개될 당시 직접적인 탄압은 불가능했다.


자산에서 내려다본 부론면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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