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 일지」네 번째:당신의 어머니는...?(2)

모두 흩어 보내버리지 않기 위한, 감추지 않은 익명의 상담 기록

by 나른한여우

그렇게 암이라는 거대한 병마가 물러가고 건강을 되찾아 어머니와 나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라는 해피 엔딩 스토리를 전하고 싶지만, 우리네 인생은 달기보다는 쌉싸름할 때가 많다.


형과 나 마저도 병든 어머니를 잘 모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형은 나만큼 다정스러운 성격이 못되어 무뚝뚝한 편이었고, 아픈 어머니에게 큰 소리를 낼 때도 있었다. 나라고 어머니에게 잘했던 것은 아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마트에서 장 봐 온 오징어를 다듬어 달라고 하셨는데, 생전 오징어 내장을 빼본 적 없는 내가 어떻게 그걸 다듬겠는가. 못하겠다고 하자 어머니께서는 왜 그런 것도 못하냐며 짜증을 내셨다. 그날따라 나도 예민했는지, 더 큰 짜증으로 되받아치며 한참을 토라져 있었던 적이 있다. 다만 나는 아프지 않고 어머니는 아픈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결국 어머니는 스스로 요양병원을 찾아 들어가셨다. 천만다행으로 어머니께서 영리하게 이런저런 보험을 잘 들어놓으셔서 경제적 어려움까지 이중고를 겪진 않았다.


그날은 생생히 기억이 난다. 여느 평범한 날이었는데,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한쪽 다리가 저리더니 힘이 잘 들어가질 않는다고. 전에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을 때도 허리가 욱신 욱신 쑤신다고 몇 번 말씀하시긴 했다. 연세도 있으셨고, 운동도 통 못하셨고, 살집도 있으셔서 나는 그게 다 운동 부족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침 같이 보던 예능에 김종국이 나왔는데, 저 사람도 원래 허리가 엄청 안 좋아서 군대도 못 갔는데 운동으로 좋아졌다고 엄마도 운동 좀 하라고 핀잔을 놨었다.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 요양병원으로 갔는데, 어머니가 연신 다리를 절며 계단 앞에 서 있었다. 당장에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다. 담당 의사는 긴급하게 CT며 MRI며 촬영을 했다. 어머니의 투병 생활이 2년이 넘었는데, 담당 의사를 만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처음 진단받은 난소암은 호전세였지만, 척수 쪽에 암이 전이가 되었단다. 원망 섞인 마음에 그 담당 의사에게 어떻게 이렇게 악화될 수 있느냐며 쏘아붙였다. 하지만 담당의사는 그간 홀로 씩씩하게 견뎌낸 어머니에 대해 설명했다. 또, 어떻게 이렇게 어머니를 홀로 싸우게 할 수 있느냐며 되려 혼을 냈다. 그 말이 참말로 맞아 나는 아무 대꾸를 하지 못했다.


전이된 암은 훨씬 더 무서웠다. 어머니의 몸은 오랜 투병생활로 이미 병마와 싸울 상태도 아니었고, 또 전이된 부위는 겉으로 증상이 크게 드러나지 않던 난소와는 전혀 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되셨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도, 형도, 아버지도 더 이상 지난 일과 자존심은 중요치 않게 되었다. 해야만 하는 일들을 이제라도 해내야 했다. 이때부터는 형과 아버지와 3교대로 간병인 노릇을 했다. 간병인을 따로 쓰기는 했지만, 어머니에게는 가족이 필요했다. 2~3일에 한 번씩은 아버지와 같이 혼자서 움직일 수 없는 엄마를 씻겨야 했다. 들것에 실어 샤워장으로 옮기고 여기저기 거품칠을 하고 씻겨냈다. 뽀얗게 씻고 나온 엄마가 거울을 보며 미소 지을 때면, 아주 잠깐씩 이 이야기의 끝에 해피엔딩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따뜻한 봄날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산책했던 나날도 있다. 그날 따라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엄마에게 젊었을 적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아마 그 일들이 궁금해도 더 이상 물을 수 없는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젊었을 적 제약회사의 생산직을 했던 이야기, 그때 친했던 사람들. 함께 일했던 직원이 영양제를 잔뜩 줘서 너희들이 그걸 먹고 컸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때 이것저것 한참 더 물어볼걸 싶다. 날 낳았을 땐 어땠는지, 내 어린 시절 엄마는 어땠는지. 그날은 병원을 나서는 길이 유난히도 파릇파릇했다. 자라나는 봄날의 새싹들을 보며 저것들은 새로이 피어나는데 우리 엄마는 점점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어머니를 두고 나는 마음속에서 매일 저울질을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엄마의 곁을 더 지켜야 한다는 생각과, 상황이 그런 만큼 제대로 공부를 해서 교사가 되는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 두 생각을 놓고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당시 교사를 준비하던 나는 첫 해 시험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두 번째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임용고시는 내게 넘을 수 없는 큰 산에 가까웠고, 언젠가 합격할 수 있을까 하는 소심한 희망을 품기에도 내 실력은 형편없었다. 엄마는 아픈 자신이 자식에게 짐이 되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엄마를 만나러 가면 엄마는 내게 그 시간에 공부하지 뭐하러 왔느냐고 말씀하시곤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또다시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엉뚱하게도 나는 게임을 열심히 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을 잊기로 작정을 했다. 참으로 못났었다.


또다시 전화가 요란하게 울린 날이었다. 이제는 평범한 환자들과 나의 어머니가 함께할 수 없던 날. 어머니의 배에 복수가 가득 차 그날따라 고통이 쉬이 잠들지 않던 날. 우리는 선택해야 했다. 어머니를 집으로 모실지, 아니면 호스피스 병동으로 모실지. 호스피스는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였다. 그런데 막상 닥쳐보니 셍긱헸던 낭만은 어디에도 없었다. 죽음이 참으로 덧없기도 했다. 그 와중에 아버지와 형과 나는 어머니의 장애판정이 몇 급이 될 수 있을까 잠깐 고민하기도 했으나, 이제 어머니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시한부 인생일 뿐이었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긴 후에도 어머니는 제법 의연했다.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마저 아들들에게는 숨기고 싶었던 걸까. 어머니의 의식이 돌아왔을 때 유언을 부탁해야 했는데, 마치 그 부탁이 어머니의 죽음을 확정 짓는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깐 의식이 돌아온 어머니는 내게 어머니는 장롱 속 목걸이는 네가 가지고, 반지를 형을 주라는 말을 남겼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통장의 돈의 일부를 큰 이모에게 옮겨두라 하셨다. 지금의 나로서는 겨우 몇 푼의 돈이지만, 평생에 걸친 그 돈을 어머니는 아버지가 아닌 우리에게 조금 더 주고자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마지막까지 신뢰를 얻지 못했다.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어머니는 해피엔딩을 맞지 못했다.


매일 휴대폰을 쥐고 잠에 들었다. 호스피스 병동은 죽음이 일상인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긴장의 연속이던 며칠을 지나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의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모니터의 여러 수치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함께 지키고자 여러 손님들이 다녀가셨다.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어리숙했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슬퍼하거나 사랑한다고 속삭이거나 잘 가시라고 인사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 숨을 내쉰 어머니의 기저귀를 갈고, 퇴원 절차를 밟고, 사망확인서를 여러 장 떼어 놓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장례를 모두 치를 때까지 눈물이 별로 나지 않았다. 어렸을 적 나는 울보였는데, 마치 누가 수도꼭지를 잠가버린 것처럼 통 울지 못했다.


나의 어머니는 헌신적인 사람이었고 타인에게는 다정하였으나, 남편에게는 다정하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며 그 잘잘못을 가리고자 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저 그분들은 주어진 삶을 살아냈을 뿐. 우리가 더 행복하길 바랬을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상담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다 하진 못했지만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자꾸만 울어댔다. 다른 사람에게 어머니에 대해 말하면서 울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오히려 무덤덤하게 말할 때는 있었는데, 그간 꾹꾹 눌러놨던 감정이 자꾸만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죄송스러운 마음과 아쉬움, 연민과 사랑이 한데 어우러져 자꾸만 울컥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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