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흩어 보내버리지 않기 위한, 감추지 않은 익명의 상담 기록
첫 상담 때도 이야기했던 지금까지의 내 삶을 새로운 상담사님께 간략히 요약해 드렸다. 어린 시절의 내게 안정감이 아닌 불안을 가져다주던 집과 아버지. 그리고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어머니. 그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나. 이제는 그곳에서 제법 멀리 벗어난 듯한 기분과 그럼에도 공허하거나 우울하거나, 여전히 그곳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듯한 느낌.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내지 못하는 것과 그럴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우울감까지. 나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는 상담사께서 질문을 던졌다.
오고야 말았다. 어머니에 대한 실타래를 풀어내야 하는 시간이. 사실 나도 이번 상담에서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털어내는 것이 첫 번째 과제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햇수로 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어머니를 떠올리면 울컥 그때의 감정들이 되살아나곤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이야기를 굳이 감추진 않았다. 가끔씩 자기 연민과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중첩될 때면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 적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무덤덤하게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대학교 2학년. 갑작스레 울리는 전화를 받아보니 병원이란다. 당장 수술이 필요하니 보호자가 와야 한다고 했다. 가끔은 우연들이 참 못나게 맞아떨어지는 날이 있는데,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아버지는 지방으로 일하러 갔고, 형은 군대에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갔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병원에 도착하니 곧 엄마가 들것에 실려왔다. 엄마는 냉장고 부품 사출공장에서 일을 했다. 가난한 집의 뻔한 스토리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을 끼이고야 만 것이다. 의사는 수술 과정에 대해 급하게 설명하고, 수술 동의서에 사인해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일을 제쳐두고 달려오고 있긴 했지만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은 있어야 했다. 결국엔 내가 사인하는 방법 밖엔 없었다.
글을 읽는 이들에게 조금 죄송하다. 약간 징그러운 이야기를 해야겠다. 미리 양해를 구해본다. 만약 사람 손이 잘리면 어떻게 하면 될까? 생각보다 우리 인체의 회복력은 뛰어나다. 아주 잘 드는 칼로 예쁘게(?) 잘렸다면, 다시 예쁘게(?) 붙일 수 있다. 이런 의료기술을 수지접합이라고 하는데, 실로 꿰매 잘 붙인 다음 거머리가 접합 부위의 피를 계속 빨게 해서 접합 부위에 강제로 피가 돌게 하는 방법으로 재생을 시킨다. 어머니가 실려갔던 그 병원이 수지접합 전문 병원인 덕택에 처음 안 사실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그 사고로 왼손 엄지손가락 한마디를 잃으셨다. 고온 고압의 프레스 기계는 사람 손을 예쁘게 자르지 않으니 말이다.
다친 손은 어머니에게 큰 스트레스가 됐다. 하던 일도 못하게 되었고 다른 부위도 아니고 손이 그러니 일상생활에 불편함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시선도 신경 쓰였을 것이다. 사람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아마도 자연 속에서 생존해 내기 위한 전략이지 않았을까 싶다. 온전히 10개가 붙어있는 일반 사람들의 손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지만, 한 개가 모자란 어머니의 손은 다분히 눈에 띠였다. 어머니는 더운 여름날에도 장갑을 끼고 다니셨다. 다친 손가락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불화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아버지도 속상하셨을 테지만, 그러니 공장 일을 왜 다녔냐는 핀잔을 늘어놓을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그 분노를 어머니의 회사에 풀었다. 사실 그 회사는 제대로 된 안전교육이나 안전장치가 구비되지 않은 채로 노동자를 부렸다. 아버지는 회사와의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나름대로 고군분투하였으나 역시 돈이 문제였다. 아버지는 회사를 상대로 혼자서 싸웠고, 여러 날 일을 하지 못해 돈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그런 상황에 돈을 요구하는 아버지가 지겹고 미웠을 테다. 두 분은 또 다시 많이 다투셨고, 점점 더 멀어졌다.
그날은 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엄마가 처음 암 진단을 받던 날 말이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걸까? 몇 해 전 다행히 조기에 발견됐었던 자궁 근종이 불행을 먹고 자라 난소암이 되어버렸다. 어머니에게 찾아온 거대한 병마가 스물세 살의 나에게는 솔직히 두려운 존재였다. 함께 싸웠어도 모자랐을 텐데 내가 두려움에 떨며 외면하는 동안 어머니는 외로이 병마와 싸우셨다. 항암제를 맞아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어머니를 보고 속상해했지만, 정작 예쁜 모자 하나 사드린 적이 없다.
나의 어머니는 교회 집사님이었다. (아버지는 엄마를 신자가 아닌 환자라고 표현했다.) 나중에는 권사님도 되셨다. 교회 일에 열정적이셨고, 희생적이셨고, 봉사에도 적극적이셨다. 가난과 가정폭력, 사고와 암 투병까지. 어머니는 예수의 십자가를 보며 그 모든 고난을 홀로 짊어졌다.
물론, 아버지가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이맘때는 아버지도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어떻게든 어머니를 도와 병마와 함께 싸워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무너진 신뢰가 하루아침에 회복될 수는 없는 법. 어머니는 아버지의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두 분 사이에 여전히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어머니의 투병 생활은 제법 길어졌다. 형은 그 사이에 전역을 했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거의 완전히 갈라서서 형과 내가 함께 자취하는 자취방에서 셋이 살게 되었다. 자취방이긴 했지만 작은 아파트의 전셋방이어서 셋이 살 만은 했다.
어머니의 병은 나아지고 있었다. 항암치료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먹는 약은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우는 방법이다. 물론 요즘에는 특정 암을 타깃 할 수 있는 좋은 항암제가 계속해서 개발되고 있지만, 1세대 항암제는 우리 몸의 모든 체세포 분열하는 세포를 다 죽이는 방법에 가깝다. 머리털이 빠지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수술이 가능할 때는 수술로 암세포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난소는 포도송이 모양으로 퍼져 있는 형태라서 이곳에 암이 발생할 경우 수술로 치료하기는 쉽지 않다. 다른 방법은 방사선 치료가 있다. 방사선 치료는 인체 내부에 좌표를 찍어 강한 에너지를 주는 방법인데, 특정 부위의 세포를 파괴할 수 있어 몸에는 덜 해로운 방법이다. 다행히 어머니의 난소암은 방사선 치료에 꽤 효과가 있었다. 크기가 계속 늘지 않고 있었고, 분명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