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평의 아파트를 떠나 구기동 언덕 위 14평의 다세대주택을 구입해 이사했다.
아파트를 벗어난 것은 30년 만의 일이다.
나는 이 집을 월든(Walden)이라고 부른다.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통나무집을 지어 살았던 매사추세츠의 숲 이름이다.
세상에 숲이 아닌 곳이 어디 있으랴.
이 집이 소로의 통나무집과 다른 것이 있다면 숲을 내려다본다는 것뿐이다.
이전에 살던 아파트는 분명 좁은 집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전에는 그보다 더 넓은 아파트에서 살았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집 안에만 있는 것이 힘들었다.
독서도 힘들었고 무언가를 쓴다는 집중은 더 힘들었다. 온종일 TV화면 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나마 참을만했다. 그마저도 힘들면 휴일이라도 밖으로 나가야 했다.
나는 그 이유도 알고 있었지만, 함께 사는 구성원들의 사정 때문에 30년을 사는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평면이 아무리 넓어도 그 아파트들은 '좁은' 집이기 때문이다.
30년 만에 스스로에게 안식년을 선물하고 이 '통나무집'에 거주 한 지 6개월, 예상했던 현상이 일어났다.
이 집으로 옮기니 그 '좁음'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을 예상하고 이 집을 선택했다.
살던 아파트와 이 집의 차이는 '단면의 변화'가 있고 없음의 차이다.
이 집으로 옮기고 나서는 온종일 집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게 됐다. 불과 반년 만에 생긴 행태이다.
생리적인 변화도 꽤 컸지만, 그것은 확증할 수 없는 것이니 언급하지 않는다.
다섯 명의 건장한 중년 남성들이 쳐들어와서 저 좁은 공간에서 대화를 나눠도 누구 하나 '맥주는 나가서 마시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직업상 나는 그런 것을 잘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공간 내에서의 많은 행태가 단면의 구성에 따라 바뀐다.
물론 단면의 구성 외에도 중요한 몇 가지가 있지만, 결코 공간의 넓이나 인테리어의 수준에 따라서 바뀌지는 않는다.
그 공간이 카페나 사무실이 아닌 주거공간이면 단순히 '행태'의 변화를 넘어서 '성향'의 변화와 심하게는 '인성'의 변화까지 만들어낸다.
*사실 사무실에서도 공간의 형태가 근무자들의 태도와 나아가서는 회사의 성격을 결정짓는다.
김어준은 성수동의 인쇄공장을 개조해서 딴지일보의 사무실로 썼었다. 그 사무실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올 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왔다. 30년 전 이야기다. 나도 2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 소방서처럼 봉을 타고 내려오는 공간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의 회사 분위기는 다른 곳과 많이 달랐다. 긍정적인 면에서.
어느 날 무심히 TV를 보고 있었다.
거리에서 한 무리의 여고생들이 리포터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그중 한 학생이 무어라 말을 했는데, 갑자기 '저 애는 단독주택에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요즘 아이가 단독주택에 살고 있을 확률이 얼마나 작은가.
그런데 우연히 그들의 대화가 어디에 살고 있냐로 진행되었다.
그 여학생이 '저는 단독주택에 살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많이 놀라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 많은 생각과 관찰을 하게 해 준 경험이었다.
단독주택이라고 모두 내부에 단면의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단독주택이 아이의 인성에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은 '불편하기' 때문이다. ('집은 햄버거보다 중요하다' 참조)
하지만 단면적인 구성이 아파트와 다른 것도 크게 작용한다.
단독주택에는 마당과 대문 밖의 골목까지가 주거공간에 포함된다.
인간은 개미와 고양이 중에서 개미에 가깝다.
3차원 공간에 대한 인식이 숙명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평면적인 변화감에는 놀라지 않고 단면적인 변화감에는 쉽게 자극받고 때로는 감동도 받는다.
위로 무한히 펼쳐진 공간 앞에서는 감동을 받고, 아래로 깊게 펼쳐진 공간 앞에서는 공포를 느낀다. 그것이 고양이와 다른 점이다.
로마의 판테온이나 쾰른의 고딕성당 안에 들어간 관광객의 눈은 모두 위를 쳐다보며 감탄한다.
좌우를 둘러보며 평면의 구성에 감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조금 가벼운 어투로 공간을 사람의 생김새에 비유하자면, 넓이는 명품백이고 인테리어는 화장이다.
하지만 모두가 안다. 본바탕이 잘생긴 사람을 그런 것들로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공간에서 본바탕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단면의 생김새이다.
괴테가 건축을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했다.
음악이 되려면 리듬과 멜로디가 필요하다.
리듬만 있는 것은'랩'이고 멜로디만 있는 것은 '학교종이 땡땡땡'이다.
건축에서 멜로디는 단면의 변화이지 결코 평면의 변화가 아니다. 낡은 견해라고 말할지 몰라도, 나는 에미넴이 결코 헨델보다 풍요롭지는 못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아이들의 70%가 랩 같은 공간에서 자라고 있다.
건축이 주는 아름다움 운율 속에서 키우고 싶다면 단면의 변화가 있는 집에서 살아야 한다. 넓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현실에는 단면의 구성까지는 바라지도 못하고 필요한 평면조차도 부족한 상황이 많다는 것을 당연히 안다.
단면의 구성 운운하는 것은 사치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작은 집일수록 단면의 변화는 더 중요해진다.
우리가, 정확하게는 소비자들이 그 중요함을 놓치고 있을 뿐이다. 공급자는 소비자의 요구를 따른다.
인류 최초로 고층 아파트를 만든 것은 르 코르뷔지에이다.
그가 마르세이유에 만든 아파트는 전쟁으로 집을 잃은 저소득층을 위한 집합주택이었다.
한 세대의 전용면적은 50~100㎡이다.
그럼에도 그가 그 작은 아파트에 복층형의 유니트를 넣은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복층과 2개 층은 단면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도시화된 주거에서 많은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그것이 수십만 년 인류가 살아왔던 그것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 안에 갇혀 있는 시간이 너무 길다.
친구들과 뒷산에 올라가 몰래 불장난이라도 하며 놀던 때와는 공간체험이 너무나 다르다.
모든 것이 경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다.
돌연변이적인 재능이 없다면 개인적 체험과 사회적 유전(meme)이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개인의 디자인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다양한 작품을 많이 가봐야 한다.(외국 답사를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20년 넘게 같은 학교에서 같은 학년의 학생에게 설계를 가르치다 보면 미세하게 시대의 흐름을 관찰할 수 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의 하나는 학생들이 점점 단면의 구성을 못한다는 것이다.
작곡을 한다면서 멜로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물론 이런저런 사진을 보고 간접 체험한 것을 흉내내기는 한다.
하지만 그 설계안을 가지고 함께 분석해 보면 그가 디자인한 공간의 단면적 느낌은 관념적일 뿐이라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아름다운 공간이 될 턱이 없다.
그들의 탓일까.
공간의 단면적인 체험을 말하는 학생들이 점점 줄어든다.
자랄 때 다락이나 지하실, 지붕 위에서 느꼈던 공간체험을 말하는 학생도 거의 사라졌다.
기억 또는 추억이라는 것은 대부분 어느 장소에 대한 특정이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자기만의 기억 또는 체험의 합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고유한 공간 또는 장소의 기억이 없는 것이 곧 정체성의 부재와 연결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똑같은 단면 구조속에서 자라는 성장기에 무슨 정체성이 형성되겠는가.
성장기의 아파트 생활이 그들에게 3차원의 공간을 읽는 능력을 퇴화시키고 있다.
아이들을 점점 더 개미로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한결같이 똑같은 개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