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 유감(2)

누가 눈먼 자들을 이용하는가

by 언덕 위의 건축가

다시 두 장의 그림이 있다.


왼쪽의 그림은 러시아 드빈스크 출신의 유대인 마르쿠스 야코브레비치 로스코비츠가 1950년대 후반에 그린 것이다. 오른쪽 그림은 그보다 앞선 1940년대에 러시아 극동의 한 미술학교 여학생이 그린 그림이다.*

마르쿠스 야코브레비치 로스코비츠는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 마크 로스코로 개명한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쯤 되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가 없다.

예술의 본질과 서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모든 예술에는 '자아실현'과 '욕망'이 함께한다.

'자위'와 '성공'으로 번역해도 상관없다.

고흐, 헨리 다거의 그림이나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은 욕망의 함량이 1그램도 안 되겠지만, 뱅크시를 포함한 대부분의 예술에는 욕망의 함량이 50그램이 넘는다.

예술의 순수함은 자아실현에 있다고 한다면, 위 두 그림은 누가 언제 그렸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냥 마크 로스코의 부모가 뉴욕으로 이주한 것, 그리고 '15인의 미국인전'에 참여한 것이 우연이었을 뿐이다.

예술은 우연일 수도 있다. 2025년 북촌에서 찍은 어느 집의 담장.


우리가 알게 된 모든 예술은 '결국 성공한' 작가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 모든 예술의 가치매김에는 예술품과 예술가를 둘러싼 서사가 작용을 한다.

과연 고흐가 부유한 암스테르담의 가정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떠난 여름 휴양지에서 하녀가 와인을 갖다 주는 저녁에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어도 그 그림이 똑같이 보일까.

결국 예술과 서사는 떼어낼 수가 없다.


나는 에밀 아자르가 쓴 '자기 앞의 생'을 중학생 때 읽었다. 그리고 로맹 가리가 쓴 '새들은 페루

에 가서 죽다'를 대학생 때 읽었다. 두 작가가 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 이후에 알았다.

알다시피 작품의 본질이 아닌 자신의 서사로만 평가하는 것에 환멸을 느껴서 로맹 가리가 가명을 썼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그런 서사를 알기 전에 이미 읽어버린 '자기 앞의 생'이 내 안에서 다른 자리로 옮겨 앉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로맹 가리 같은 사람은 드물다. 오히려 본질이 아닌 서사로 작품을 포장하려고 드는 족속이 훨씬 많다.

스페인 관광청이 그중 하나이다.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것이 그들의 할 일이니까.

다만 이순간에도 TV에 나와서 눈먼 자들에게 가우디의 찬가를 들려주고 있는 유사 건축가들은 문제다. 그에게 배우고 있는 학생들이 걱정된다.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나 더 했으면 좋겠다.


다시 앞장의 두 건축물로 돌아가보자.

당연히 오른쪽의 건축가는 안토니오 가우디다.


가우디 건축의 본질에 대한 설명은 다음 장으로 넘겨야 하겠다.(모처럼 삐딱한 심성으로 글을 쓰니 할 말이 늘어난다.*)


사람들이 외우는 가우디에 대한 찬가는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그의 천재성 그리고 또 하나는 그의 생애에 관한 서사.

그의 작품에 대한 본질적 해석으로 가우디를 칭송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일반 대중들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가우디 건축을 제대로 해석해주는 건축가는 못봤다. 적어도 마이크를 잡고 있는 건축전문가들 중에는.

먼저 그의 서사부터 바로잡아보자. 거듭 말하지만 서사도 중요하다.

세기말의 스페인

앞의 그림에서 실험한 것과 같이 작품은 언제 만든 것이냐가 매우 중요하다.

누가 먼저 한 것이냐도 중요하지만 그 시대의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냐가 더 중요하다.

특히 건축에서 시대성은 작품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건축은 미술이나 문학처럼 골방에서 자기만을 위해서 생산해도 되는 대상물(object)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우디 작품의 시대성은 다음장에 쓸 중요한 내용이니, 여기서는 당시의 시대상황만 살펴본다.


가우디가 활동하던 19세기말의 스페인은 마지막 브루봉 왕가인 알폰소 13세와 그의 모친이 불안하게 왕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시절이다.

나폴레옹 시절부터 스페인에는 가톨릭의 권력으로 대변되는 구시대의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한 운동이 있었다. 프랑스혁명에서 자극을 받은 것이었다. 아프렌쎄사도라 고 불리던 이 운동의 초기에는 카탈루냐 출신의 프란시스 고야도 참여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처절하게 배신당한 후에 고야는 그 끔찍한 동판화들을 그렸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사촌동생을 스페인 왕으로 앉혔고, 가톨릭 교회가 거기에 협조했다.

이 이후 알폰소 13세가 리베라 장군의 군사독재를 허용하던 1920년대까지 스페인의 분위기가 어떠했을지가 궁금하다면 고야의 동판화들을 보면 된다.

게중에 덜 잔인한 그림을 골랐다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 지방의 분위기는 더 심했다. 봉건에서의 탈피, 공화정 실시 그리고 독립에 대한 요구까지 더해져서 여느 유럽의 세기말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불안하면서도 강렬한 분위기였다.


평생 동안 가톨릭 사제들 부자들, 귀족들 그리고 군사권력과 불편 없이 지내던 가우디가 세상을 떠나고 5년 후, 결국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다. 가톨릭 교회와 프랑코 장군이 결탁한 왕당파에 저항해서 공화파가 싸운 전쟁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로버트 카파의 사진,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레마르크의 '개선문' 등의 배경이 되었던 전쟁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잠깐 동안의 공화정은 히틀러가 보내준 전투기에 의해 붕괴되고, 스페인은 역사를 거슬러 다시 왕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모여들었던 젊은이들의 피는 의미 없이 지워졌다. 카탈루냐는 여전히 스페인의 일부로 남아있고, 지금도 스페인 인민들의 고민으로 남아있다.

역사는 끝끝내 현재의 어딘가에서 작동한다.


낙제점을 준 교수들

가우디의 서사 중에는 '천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낙제점을 준 멍청한 교수들'이 등장한다.

다음장에서 설명할 본질적 이유를 들려주면서 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가우디를 가르쳤다면 과연 낙제를 시킬 수가 있었을까? 그래도 뭐라도 열심히는 하는 것을 참작해서 60점이라도 줬을 것 같다."

그 교수들이 나보다는 나은 교육자들이었다.


비참한 죽음

그의 비참한 죽음으로 그를 미화시키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말년만 비참했다.

그리고 비참함이 위대함은 아니다.


1974년 3월 17일, 뉴욕 펜실베이니아 역의 남자 화장실에서 한 노인이 사망한 채 발견됐다.

노인의 행색이 너무 초라해서 그의 신원이 밝혀질 때까지 며칠 동안 행려병자 영안실에 머물렀다.

그의 신원이 밝혀지자, 뉴욕타임스는 부고란이 아닌 1면에 그의 부고소식을 싣는다.

“벽돌과 콘크리트로 위력적인 형태를 창조하며 수많은 건축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미국 최고의 생존 건축가로 학계의 인정을 받았던 루이스 I. 칸이 일요일 저녁 뉴욕 펜실베이니아 역에서 73세의 나이로 하직했다.”


루이스 칸은 '빛과 침묵의 건축가'로 불리는 위대한 건축가이다.

건축과에 입학하고 그가 한 말을 읽었을 때, 비로소 건축에 대한 나의 사랑이 시작됐다고도 말할 수 있다.

"태양의 위대함은 건축물에 비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누구도 그가 행려병자로 죽었다고 존경하지는 않는다.


* 죄송하다. 잠깐 로맹 가리 흉내를 내봤다.

* 누군가를 냉정하게 비평하는 말은, 강단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하거나 우리끼리 읽는 전문지에 기고하지 일반인들에게는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나마라도 일반 대중이 건축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어디냐.

하지만 이번 주만 해도 가우디를 숭배하는 글을 몇 개나 마주치게 된다.

당연히 그들 중에 건축가는 없다.(제대로 된 건축가 중에서 가우디를 칭송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디자인 분야에서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잘된 사람을 시기하는 불만만 가득한 사람으로 보일 염려도 있다.

하지만 나는 루이스 칸, 르 코르뷔지에, 군나 아스푸른트 뿐만 아니라 유동룡, 정기용, 차운기, 박승홍 등 수없이 많은 건축가들에 대한 칭찬의 글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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