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 유감(1)

누가 눈먼 자들을 이용하는가

by 언덕 위의 건축가

두 그림이 있다.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일까.





'나는 그 건축가 별로던데....다들 대단한 작품이라고 하니...심지어 TV에 나오는 유명한 교수님까지....대단한 건축가가 맞겠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당신은 취향이라는 것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이 말하는 그가 훌륭한 건축가인지 아닌지는 그다음 얘기다.

취향이 없는 예술애호는 그냥 장식적 교양일 뿐이다.

그들은 어디든 달려간다. 가급적 유명한 전시를 찾아서. 또는 이미 서너 번도 더 봐서 내용을 훤히 알고 있는 뮤지컬을 찾아서.


고백하건대 나는 클래식 음악의 애호가는 못된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다 좋기 때문이다. 그래도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을 즐기기 위해 드비쉬를 틀지는 않는다.

대중음악에는 초보 애호가쯤 된다. 나는 프로그래시브 락을 찾아서 듣는다.


건축에 관해서 글을 쓰고 학교에서는 건축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위와 같이 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설명해 줄 약간의 책임이 있다.

그의 생각이 옳다면 그 이유를, 또는 그의 그 생각이 옳지 않다면 그 이유를.


K건축에는 냉정함이 없다.

건축이 아닌 몇몇 다른 예술분야도 그런 것이 보인다.

냉정한 비평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는 분야가 더러 있다.

소위 뻔한 주례사 같은 평론만 보인다. 그 주례사가 자기를 포함한 모두를 죽이는 추도사가 된다는 점을 그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저녁 피로연의 초대명단에 빠지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중요하다.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이 소위 '하위문화'라고 부르는 분야에서는 언젠가부터 날것의 비평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느낌으로는 90년대부터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치열함'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이 보였다. 당연히 수준이 높아져갔다.

축구가 중국을 따라오지 못하게 만들고 K팝, K드라마, K뮤비가 그래서 수준이 높아졌다.

전 세계 소비자들의 혹독한 평가를 통과한 K뷰티뿐만 아니라 경쟁력을 가진 모든 분야가 예외 없이 그렇다.

영화를 잘 못 만들어서 내놓으면, 같은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이 유튜브 채널에 얼굴을 내밀고 혹독한 비평을 하는 성숙함을 쉽게 본다. 참으로 부러운 일이다.


건축은 아직 멀었다.

덕분에 K건축은 칠레의 건축이나 말레이시아 건축보다 아래로 취급받는다.*

아무도 사 가지 않고 오히려 아직도 비싼 돈 주고 사 온다. 이 대단한 건설시장의 나라에서.

강남 고급 아파트의 전단지에는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설계했다는 문구가 들어가야 한다.

강변역에 거대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어느 재벌의 총수는 그 수많은 설계용역을 수행하는 국내 설계사에 지급한 것보다 더 큰 100억에 가까운 금액을 영국의 어느 유명 건축가에게 지급하며 자문을 받는다.

그의 나이 91세, 디자인 콘퍼런스에 그가 참여하는 장면은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J팝, J아트, J푸드가 전 세계를 휩쓸던 7, 80년대에 J가전뿐만 아니라 일본의 건축가들도 전 세계로 팔려갔다.

기쇼 구로카와, 아라타 이소자키 등등.

안도 다다오는 일본 건축사협회의 배려로 그 대열의 막내로 올라탔던 행운아다.

물론 그의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도 정도의 건축가는 심지어 한국에도 널려 있었다.

영어도 일본 건축가들 보다는 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부 건축가들의 잘못은 아니다.

학교 선생이라고 하는 비전문적 집단에게 건축을 평가할 권력을 쥐어주기 이전에는,건축이(당연히 나는 포함되지 않는) 이렇게 형편없지 않았다.

지금은 축구선수를 필기시험으로 뽑는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너그러운 것이다. 실상은 더 형편없는 기준으로 뽑는다.

천재적인 재능을 말살하는 치명적인 방법이다.

자신들이 학생들을 가르쳐 내보내고는, 곧장 죽여버린다.

자꾸 중국축구와 K건축이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입이 열린 김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옛날에 네덜란드의 한 동네 유치원 설계안 공모전을 간접적으로 본 적이 있다.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이 설계안을 출품해서 마을 회관에 전시한다. 그리고 동네 주민들이 작품들을 평가했다.

그 평가의 수준이 한국의 건축선생들의 비평 수준보다 훨씬 높다고 느꼈었다. ('알도로시와 이탈리아 할머니들' 참조)


두 건축물이 있다.

물론 사진이 건축작품은 아니지만 어느 작품이 더 훌륭한 작품일까.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서, 왼쪽의 그림은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다.

오른쪽은 내 작업실 현관문 위에 걸려 있는 이름 없는 공장 노동자의 제품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로스코의 그림이 훌륭한 작품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새로운 것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시피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서 추종자와 아류작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취향이 생기면 앨범재킷이나 포스터, 하다 못해 잡지 사진이라도 붙여 놓고 싶어진다. 당신의 방에 무엇이 걸려있는지 보라. 그것이 당신의 취향이다.


두 건축작품 중에 왼쪽 것은 1928년에 빈에서 태어난 한 유대인 건축가의 1991년 작품이다.

오른쪽 것은 1852년 스페인 카탈루냐(스페인보다 카탈루냐가 중요하다)에서 태어난 가톨릭 가경자이기도 한 건축가의 1906년 작품이다.

두 작품의 사이에는 85년의 차이가 있으며, 왼쪽 것은 여러 세대가 사는 사회주택이고 오른쪽은 백작 가문에 장가든 어느 부자의 단독주택이다.


결론을 먼저 말하고 설명으로 넘어가자면, 오른쪽의 건축가를 추종하거나 베끼는 건축가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그가 누군가를 추종한 마지막 무리 중 한 명이었다.


* 건축디자인을 나라별로 순위 메기는 곳은 없다. 다분히 나의 주관적 견해이긴 하지만, 굳이 참조하자면 '세계건축연감'이라는 간행물에 실리는 건축작품의 나라별 숫자가 내 견해를 뒷받침한다.

상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받아내는 K건축가들은, 칠레 건축가와 달리 아직 프리츠커상을 받지 못했다.

말레이시아도 얕보면 안 된다. 오랜 영국 식민지 시절의 유산으로 그 사회에는 냉정한 평가라는 것이 어느 정도 있다고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