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눈먼 자들을 이용하는가
이 글이 누군가를 폄하하는 듯하게 기울어져 가는 것이 편하지가 않다.
사실 가우디에게는 아무런 유감이 없다. 나하고는 상관도 없는 땅과 시간에서 일했던 건축가에게 무슨 유감이 있겠나.
건축문화가 성숙된 사회의 평론가들이 쓰는 냉정한 비평들을 읽을 때면, 글 쓴 이의 오만이나 몰인정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와 일반대중들에 대한 높은 존중이 느껴진다.
그런 글들을 읽는 사회에서 내가 언급했던 '이탈리아 시골의 할머니들'과 '네덜란드 유치원 학부모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는 그 사회의 수준 높은 건축문화로 이어지고, 건축이 문화 전반에서 차지하는 무시 못할 비중을 고려할 때 그 사회 전체의 문화 수준에도 당연히 좋은 영향을 미친다.
학생들이나 동료들과 건축을 얘기할 때와 일반인들과 건축을 얘기할 때의 내 논지는 달라진다.
가령 학생들이 안도 다다오에 대해 어디선가 들은 뻔한 찬사를 말할 때엔, 그것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바로잡아 준다. 하지만 일반인들과 안도에 대해서 말할 때는 다르게 말한다. 뮤지엄 산에 가보는 것도 말리지 않고, 특히 제주도에 가면 본태미술관에 꼭 들러보라고 말해준다.
그들이 그 건물을 통해서 모더니즘 건축이나 노출 콘크리트 같은 건축재료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경험해 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의 방문에 관심을 보이면, 가는 길에 거기서 멀지 않은 유동룡 기념관이나 그의 작품 몇 곳에 잠시라도 들린다면 더 좋다고 덧붙여준다. 돌과 나무, 그리고 빛과 시간을 다룬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한 번 느껴보길 바라면서.
모두가 건축문화의 한걸음 나아감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이다.
하지만 가우디의 경우에는 그럴 수가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글의 제목은 '가우디 유감'이 아니라, '가우디 현상 유감' 또는 '누가 눈먼 자들을 이용하는가' 정도로 붙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이제 가우디를 둘러싼 서사가 아닌 그의 작품 자체에 대한 해석을 할 차례다.
나는 꽤 많은 건축역사서나 비평서, 이론서들을 읽은 축에 속한다.
내가 읽은 건축비평서 중에 으뜸으로 치는 것은 힐버자이머가 쓴 '현대건축의 원류와 동향(Contemporary Architecture: Its Roots and Trends)'이라는 방대한 저서이다. 원본이 독일어인 책의 내용이 너무 딱딱하고 방대해서 건축과 학생들에게 권하는 도서목록에도 포함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현대건축의 역사나 정론적인 건축비평에 대해 제대로 쓴 책을 한번 읽고 싶다면 반드시 이 책을 완독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찰스 젱크스, 로버트 벤튜리, 전진삼, 임석재 등 우수한 건축평론가 중에서도 나는 힐버자이머를 최고로 꼽는다.
이 글을 쓰면서 그의 책을 다시 꺼내 봤다.
1850년대 영국의 죠셉 팍스톤부터 1950년대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까지, 약 220쪽 분량(원본 기준)으로 100년 동안 활약했던 110여 명의 건축가와 작품을 상세하게 분석한 그의 책에 가우디에 대한 기사는 반쪽 분량만을 할애하고 있다.
힐버자이머의 견해가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며 시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스페인이 유로존에 가입한 2000년이 되기 전까지, 가우디는 건축가들 사이에서 주목받을 일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참고로 힐버자이머는 가우디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가우디는 아르누보에 실제로 속해 있었는가? 아르누보는 공업이 발달한 북부지방에 실재했고, 스페인에는 공업이 없었다."
"그의 작품은 기이한 것을 공상적인 것에 곁들인 '그의 환희'이다."
40년 전에 읽었던 책의 반쪽짜리 기사를 기억해서 '가우디의 아르누보는 내 생각과 다르다'라고 앞에서 말했던 것은 아니다.
누구든 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그의 건축이 서유럽의 아르누보 건축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유럽의 아르누보는 그 이름 '신예술(New Art)'답게, 그전에는 쓰지 않았던 주물공장에서 생산된 주철장식을 대량으로 사용했다.
가우디는 고집스럽게 공장 생산물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밖에도 여러 면에서 가우디는 과거의 방식으로 회귀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과연 그가 '신예술'을 지향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그의 건축을 '스페니쉬 아르누보' 또는 '스페니쉬 바로크'로 분류하는 것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분명히 중세성당(Gothic Cathedral)이다.
동시대, 즉 아르누보 시대뿐만 아니라 바로크나 르네상스 시대에도 이미 사라져 버린 드높은 첨탑.
그것이 사그라다 파밀리아다.
아르누보적인 디테일, 북아프리카 또는 이슬람 문화의 흔적 등을 아무리 갖다 붙여도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디자인은 '첨탑(spire)'이다.
고딕의 특징을 얘기할 때 등장하는 뾰족아치(pointed arch), 공중부벽(flying buttress), 장미창(rose window)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명동성당의 경우처럼* 어느 시대에서나 고딕을 재현하고 싶을 때에는 그런 것들은 생략해도 첨탑은 반드시 만든다. 첨탑이 곧 고딕이고, 첨탑이 강조된 성당은 '고딕성당'이 아닌 무엇으로도 부를 수 없다.
이로서 가우디의 디자인이 무엇을 꿈꾸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분명해진다.
그는 중세의 상징을 카탈루냐 한복판에 우뚝 복원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가우디 말년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생물학에서 말하는 '개체의 진화는 계통의 진화를 반복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가우디 작품세계의 퇴행은 그 생애의 퇴행에서 반복된다'
가우디는 뛰어난 장인이었을 뿐이다.
조선시대의 자개장을 그 시대보다 더 웅장하게 재현해 내는 자개장인과 같은 것이다.
장인 가우디에 평가는 따로 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것도 옳지만은 않다. 대체로 장인이란 무언가를 노동을 통해 직접 만드는 사람을 일컫는다.
어쨌든 가우디를 위대한 건축가라거나 천재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모든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천재에 대한 모독이다.
시대를 앞서 나가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우리는 천재라고 부른다.
게다가 개인적인 불이익을 무릅쓰고 이타적인 마음으로 그런 일을 한다면 그를 영웅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편 시대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오히려 뒤로 역행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바보라고 부르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그런 짓을 하면 반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우디는 건축가의 기본적인 도덕, 즉 건축주의 요구를 경청하는 것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느 건축주가 자신의 손자가 죽을 때쯤에나 완성될 건축설계를 해달라고 의뢰하겠는가.
또 준비된 예산보다 수천 배 더 들여야 지을 수 있는 건물을 설계해 달라고 했겠는가.
건축의 가치를 평가할 때 누구도 빠트리지 않는 것이 하나가 있고, 그것이 건축과 다른 분야의 예술과 구분 짓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그것은 '합목적성'이다. 그리고 대부분 건축의 목적은 건축주에 의해서 제시된다.
가우디가 고집세고 섬세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60점은 줄 수 있다.
하지만 고집과 섬세함이 예술은 아니다.
섬세한 것으로 따지자면 바로크나 로코코 또는 비잔틴 시절의 이름 없는 장인들이 그보다 훨씬 섬세했다.
동양의 도목수들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도 그들을 장인라고 부르지 예술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누군가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천장에 매달린 장식을 두고 역현수구조 어쩌고 저쩌고 하며 억지스러운 감탄을 강요한다.
술 취한 어부가 철학자를 이긴다는 속담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아둔한 어부가 건축구조라는 심오한 학문을 모독하고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런 형태의 소품은 고딕이나 바로크, 로코코의 실내장식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디자인원리나 미학적 측면에서의 조잡함에 대해서는 거론을 하지 않으려 한다. 주관적인 편견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자인에는 비례, 균형, 통일, 위계 또는 순수함, 강렬함, 따뜻함 같은 미학적 기준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끝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짓는데 130년이 넘게 걸리고 있다는 사실은, 가우디뿐만 아니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부끄러워할 일이지 자랑으로 여길 아무런 가치도 없는 신화이다. 스페인 관광청이 세뇌시키고 싶어 하는.
40년 전에 한국의 현대건설 같은 회사에 의뢰했어도, 3년 안에 충분히 완공시킬 수 있었다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서사는 중요하지만, 그 의미를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눈은 그것을 위해 달려있다.
수풀 위에 사슴뿔이 보이면, 거기에 사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 내가 이 책을 학부 2학년 때 꼼꼼히 메모를 해가면서 읽었다는 사실은 숨기지 않는 나의 자랑이다.
권장도서 목록은 '건축학도에게 권하는 세 권의 책' 참조.
*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정의하기 위해 내가 만든 용어이다. '고딕 아르누보'로 말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고딕성당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 명동성당이 고딕양식이라는 것이 의아하다면 조금은 고딕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다. 고딕성당은 주로 돌로 벽을 쌓았다. 벽돌로 벽을 만든 고딕양식의 교회는 '빅토리안 고딕'이라고 한다. 어떻든 고딕양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