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수업 제14강 재료학 - 재료를 듣다
'공터에는 아무런 신비스러운 것이 없어'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에서 친구가 주인공에게 하는 말이다.
빈 공간과 나밖에 없는 곳에서 신비를 눈으로 찾기는 어렵다.
다만 공터에는, 아직 공터로 남아있기 때문에 지나간 많은 얘기가 묻혀있다.
그곳을 현재의 이야기로 덮어버리지는 않았으니까.
한 건물에 대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늘 말하듯 글이나 사진으로 건축물을 표현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다만 이 글은 <건축수업>의 재료학 편, 그중에서 벽돌에 대한 예를 소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쓴 글의 번외 편이다.
이 건물은 벽돌이라는 소재를 가장 잘 사용했다고 내가 소개하는 건물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벽돌에 대한 얘기는 별로 없다.
서울 복판이라는 뜻의 중구에 철길 옆 공터가 하나 있다.
이 공터는 이제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찾는 이는 별로 없다.
이 공터의 지하에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 있다.
길에서는 이 공터의 지하에 박물관이 있다는 어떤 표시도 찾을 수가 없다.
그냥 공터에 붉은 벽돌의 벽이 낮게 서 있을 뿐이다.
할 일이 아주 없어 공터로 들어서든가 일부러 가야 입구를 만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계획된 시나리오의 시작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진입로는 무심하다 못해 살짝 무시하는 느낌조차 준다.
특징 없는 긴 경사로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암시하는 표징도 전혀 없다.
이렇게 이 건물이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음악은 아주 느리고 약하게 시작된다.
여기에 이 건물의 모든 스토리를 다 적을 필요는 없다.
다만 항상 강조하는 '공간의 시나리오(또는 플롯)'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고 싶다면, 이 건물의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건물은 지상의 공터에서 시작해서 지하 3층의 공터까지 연결되는 이야기다.
그 스토리 중 몇 가지 에피소드만 예를 들자면, 이 건물의 로비인 지하 1층에 들어가면 측면에 '빛우물'이 있다. 이 것은 지하라는 장소의 폐쇄감을 해소해 주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이 이야기가 지하 3층에 가서 끝난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또 보통의 건축물들이 입구와 로비 부분은 흥미롭지만 점점 안으로 갈수록 재미 없어지는 데에 비하여 이 건물은 반대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것을 위해 진입로와 주출입구 그리고 1층의 로비를 최대한 심심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건축가는, 영화로 치면 전체 플롯을 구상해서 도입부의 스크립트를 매우 평이하게 시작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엔딩 부분에서 다시 공터로 나가면서 끝난다.
이 건물의 내부에는 우리가 아파트, 교실, 사무실에서 늘 만나는 육면체의 공간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사선이나 원형의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하 3층 전시실과 예배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선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다만 여섯 개의 면이 둘러싸서 상자각 같은 공간을 만드는 장면은 도서실과 뮤지엄샾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공간은 열려 있고 서로 겹쳐있다.
이 잘 만들어진 공간의 구성을 설명할 수 있는 수많은 관점을 버리고, 이 공간에 대해서는 한 가지만 말하고 싶다.
공간의 중첩(inter-locking of spaces).
내가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중첩(layering)을 가르칠 때, 말이나 사진으로 설명하기가 제일 어려운 단계이면서 제일 중요하게 강조하는 중첩의 마지막 단계이다.
사물이 아닌 텅 빈 공간이 겹쳐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하나의 공간을 주사위라고 생각하고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주사위를 겹쳐 놓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공간이 좋은 이유는 공간이 주는 느낌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공간이라는 것은 물질 사이에 비어 있는, 즉 아무것도 없는 부분을 말한다.
그러니 모든 비어 있는 공간은 물리적으로는 다 같아야 하지만, 그 공간이 주는 느낌은 다 같지가 않다. 우리는 그것을 공간감(feeling of space 또는 sence of space)이라고 부른다.
다른 많은 것들처럼 공간감도 인접하거나 병치된 두 공간 사이의 차이에 의해서 인지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 차이는 공간의 크기, 그중에서도 높이의 차이에 의해 확실해진다. 그때 상대적으로 느끼는 느슨함 또는 압축감을 '공간의 밀도'라고 표현한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감의 농밀을 음계처럼 사용해서 어떤 음률을 작곡하는 것이 건축가가 할 일이다.
그런 음률은 대체로 단면 높이의 변화를 이용해서 연출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건물에서 건축가는 서로 다른 높이의 공간을 배치하는 것보다 조금 더 고차원적인 수법을 구사하고 있다. 공간의 전체 크기를 주무르고, 공간 속에 공간을 끼워 놓고 있다. 텅 빈 공간들 사이에도 다시 틈이 생기고 반전이 생긴다.
일종의 음의 중첩, 즉 화성이 생긴다.
그리하여 들려오는 화음에 이끌려 마지막 지하 3층에 다다를 때쯤에는, 처음 와 본 사람도 무엇인가 절정의 피날레가 다가오고 있는 예감을 느끼게 된다.
결코 판테온이나 하기아 소피아 모스크에 비할 만큼 높은 공간이 아닌데도 그 공간의 볼륨에 압도되어 잠시 멈추게 된다.
그 이유는 건축가가 이 공간에 도달하기 전에 거쳐오도록 만들어 놓은 조용한 시나리오 때문이다.
이 건물에서 건축가는 공간의 밀도를 조절하는 데에 탁월한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에서 잊지 않고 언급해야 하는 것은 빛의 연출이다. 아니 사실은 어둠의 연출이다.
건축가가 이 속에 빛을 구성한 방식, 지하의 공간에 대량으로 동원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인공조명의 사용은 최대한 절제하고 오히려 지상의 공간에서도 소홀하게 다루는 자연광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한 것, 그것도 훌륭하지만 내가 감탄한 것은 어둠의 연출이다.
모든 것이 유쾌해야 하고 모든 것이 밝기만 해야 할 것 같은 이 시대에, 건축에서 어둠이라는 것을 이렇게 대놓고 드러내기는 쉽지가 않다. 이것도 일종의 용기다.
진혼의 공간이고 박물관이기도 하니 당연히 어둡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 건물의 구성에서 진혼과 전시의 공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그리고 가 본 사람은 모두 느끼겠지만 그 어둠이라는 것이 결코 부정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비극이 주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로 설명이 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빛과 어둠이라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긴 스토리를 구성해서 약함과 강함, 느림과 빠름 그리고 마지막에는 전율조차 느껴지는 클라이맥스 그리고 마지막 티저 같은 공간의 덧붙임도 모두 섬세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구성되어 있다.
'침묵하는 매스(mass)'
미니멀 스타일을 좋아하는 건축가들이 잘 쓰는 말이다.
하지만 이 건물의 건축가에게는 침묵을 표현할 매스가 없다. 대신 그는 침묵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공간들이 시끄럽게 떠들지를 않으니 그 사이를 걷고 있으면 어디선가 음악이 들린다.
건축가가 원했던 줄거리와 각자의 에피소드들, 즉 각자의 공간이 깊고 투명한 침묵을 지키며 한 줄기의 이야기를 이 공간 속의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바닥과 천장 그리고 벽들이 모두 조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벽들이 그렇다. 직립하고 있는 우리의 시선은 보통 벽에 가서 닿는다.
모든 공간이 지하에 들어가 있으니 땅 위에는 붉은 벽 몇 개뿐 , 나를 지나치지 말고 봐달라고 소리치는 물체가 없다. 건축가가 만든 풍경은 아니지만, 사람 없는 지상의 공원도 평범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실내의 공간은 의외로 단순하지가 않다. 앞서 말한 대로 상자각 같은 공간이 거의 없고 각 공간은 서로 중첩되어 있어서 꽤 다이내믹하다.
하지만 요란스럽지가 않다. 그가 선택한 재료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재료들 모두는 원래 본질적인 모습 이외에 어떤 디테일도 가미되지 않은 채, '나는 벽입니다' '나는 바닥일 뿐입니다' 또는 '나를 주목하지 말아 주세요'라는 표정으로 거기에 그냥 있다.
서소문은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의 간문(間門)을 말한다. 양화진, 마포, 용산을 거친 삼남지방의 물류와 인파가 이 길을 그득 메웠었다.*
그 이유로 조선조 때에는 이곳에서 국사범들을 참수했다. 그리고 참수한 머리를 사람들이 보라고 한 달 동안 거두지 못하게 했다.
살아남은 자들의 눈물이 이 버려진 땅을 적셨다.
그 마지막은 신유, 기해, 병인년의 천주교인 박해였다.
뒤에 천주교에서는 그 처형의 터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 약초밭에 붉은 벽돌로 약현성당을 짓는다.
세월이 또 흘러 이제는 그 참형장에 박물관을 지었다.
형상 또는 이미지라는 것은 형태(shape)와 재료(material)로 이루어진 것이다.
성당은 언덕 위에 고딕의 첨탑으로 솟아 있고, 박물관은 낮은 땅 지하에 우물처럼 들어가 있다.
산 자의 공간은 보이지만 죽은 자의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더하기와 빼기, 음과 양, 과거와 현재, 생과 사 그 모든 것이 따로이지 않다고 말하면서, 수만 장의 벽돌들이 두 공간을 연결하고 있다.
형태만 배우고 재료를 잘 배우지 못하는 것이 우리와 서구 건축교육의 큰 차이라고 생각하는데, 보기 드물게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재료 선택을 섬세하면서 과감하게 잘 쓴 건물이다.
그것이 꼭 적벽돌이라는 외벽 재료를 성당과 통일해서만은 아니다.
공간의 구성과 그 공간들의 연결이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하는 줄거리 또는 멜로디라면, 재료는 그 스토리를 구성하는 에피소드 또는 그 교향곡을 연주하는 악기 구성이다. 그런 면에서 멜로디와 악기 구성이 완벽에 가깝게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은 글이나 사진으로는 결코 전달할 수가 없다.
무엇을 얘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는 얘기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된다. 그런 오류를 범하고 싶지는 않다.
이 건물에는 내가 다 묘사하지 않는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다.
가령 높이가 공원보다 낮은 이면도로 쪽에 노출된 건물의 외벽을 건축가는 비스듬하게 눕혀 놓았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것에서 건축가의 태도가 드러난다.
쉽게 말하자면 주변 환경에 어깨빵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은 건물의 주출입구이다.
어느 곳에도 앞으로 튀어나오게 하거나 높이를 올리거나 색다른 재료를 써서 입구를 부각시켜 놓지 않았다.
결코 작지 않은 시설인데도 불구하고 정면(facade)이라는 것을 아예 만들지 않았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냥 지나가 주세요'라고 하듯이 옷깃 안에 작은 글씨 몇 개만 적어놓은 것이 전부다.
건축은 그 무엇을 담기 위한 빈 그릇일 뿐이라는 말이 이처럼 잘 맞는 건물도 드물다.
그 비워진 속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산책하며 꼬르뷔제가 말했던 '건축 산책(promnade in architecture)'이 무엇인지를 느끼기에도 이만한 건물이 드물다.
사람이 드문 평일의 오전, 이 공간 속을 천천히 산책하면 귓속에 진혼곡이 맴돈다.
때로는 기형도의 시가 맴돌기도 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아무런 필터도 아무런 편집도 없이 갤럭시폰으로 영상을 찍어봤다. 위의 사진들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잘 찍어도 소용없다. 이미지는 건축이 아니다.
이 건물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 그래서 70년대 초 노량진으로 옮기기 전까지 서울의 수산시장이 중림동과 봉래동 일대에 있었던 것이다. 이 수산시장에 관한 얘기가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나온다.
* 사실 몇 가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자료를 뒤적이다가, 어쩔 수 없이 건축가가 누구인지 알게 됐다. 다행히 나하고는 아무런 학연이 없어서 편하게 이 글을 썼다.
* 어디에선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본태뮤지엄에 가보라고 추천한 적이 있는데, 그것과 이 건물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이 박물관을 먼저 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