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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 속 건축가 Dec 25. 2024

집은 햄버거보다 중요하다.

집에 대한 작은 철학

어느 여자중학교의 가사실습실을 카페로 개조하는 작업을 했던 적이 있다.

 

단순히 조리공간만 새로 만들지 말고, 서빙과 플레이팅, 데코레이션 나아가서는 음악의 선택까지 아이들이 체험할 수 있게 해 보자는 내 제안을 학교에서 받아 준 결과였다. 시간의 여유를 갖고 그 학교의 아이들과 디자인에 대해 함께 공부하면서 즐겁게 작업을 했다.


작업하는 중간에 담당하시던 선생님께 한 가지 제안을 드렸다.

작업에 참여하고 있던 소수의 아이들 외에 다른 친구들까지 모아주시면 강의료 없이 건축에 대한 특강을 해주겠다고.

덕분에 중학교에는 그런 특별 수업을 기획하느라 고생하는 선생님이 계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특강 역시 즐겁게 진행이 되었다.


내가 특별히 여자중학생들에게 건축 특강을 자청해서 하고자 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에게 집에 대해서 얘기해 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건축물이 지어진다. 병원, 학교, 사무실, 공장, 미술관 등등.

나는 그 건축물들을 단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한다. 사람이 사는 주택과 그 밖의 건물들.

그리고 그 두 건축물을 접근하는 태도는 매우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택은 불편해야 하고 나머지는 편리해야 한다. 물론 나의 생각이다.


건축가들은 종종 종합병원과 단독주택의 설계가 가장 어렵다고 말하는데, 하나는 극단적으로 편리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불편한 어떤 장치를 넣고 그것에 대해 이해를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주택이 불편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고 그 모두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하면 '집이 불편해야 그 속의 삶이 건강해진다'라고 말할 수 있다.


간단한 이치이다. 건강을 위해 헬스장에 가면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무거운 것을 들고 땀을 흘리면서 달리고 숨을 헐떡이면서 앉았다 일어서기를 몇십 분씩 한다. 헬스장에 가서 두어 시간 누워 있다가 오면 건강해지지 않을 것이다.


주택의 불편함이 단지 가족들의 육체적 단련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모든 불편한 요소를 제거한 공간에서는 아무런 공간적 에피소드가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도 육체와 비슷한 면이 있다. 단련하지 않으면 건강해지지 않는다. 하루하루의 일상이 러닝머신 위처럼 고될 필요는 없지만, 비바람이 거쳐진 저녁 사방의 창문들을 잠그러 다니거나 마당의 잡초를 뽑고 홈통을 막고 있는 낙엽을 제거하러 올라가야 하는 상황, 소소하게는 내 방에서 저녁상이  차려진 식탁까지 복도 정도는 지나가야 하는 과정 정도는  필요하다. 예전에는 밥을 먹으려면 마당을 건너가야 할 때도 많았다. 그런 곳에서는 때때로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생기고 아이들의 기억 속에는 다양한 공간체험들이 채워진다.

그리고 유소년기에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체험 '나만의 공간 만들기'도 어딘가 죽은 공간(dead space)이 있는 집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런 불편한 곳에서 살기를 거부했다.

우리가 택한 것은 극단적으로 불편함을 없앤 주거형식이다. 바로 아파트 또는 유사 아파트.

유사 아파트에는 아파트 평면에 단독적으로 벽을 두른 전원주택도 포함된다.


아파트라는 집합주택은 애초에 경제적 소외 계층에게 최소한의 주거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발명된 부득이한 주거형태이다.


위의 사진은 르 코르뷔지에가 1952년 마르세이유에 건축한 아파트이다.

에디슨이 발명한 전구를 지금도 우리가 쓰고 있듯이 우리 대부분이 사용하는 아파트는 그가 이곳에서 최초로 발명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설계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여러 면에서 지금 지어지고 있는 아파트들과 비교해도 더 손색이 없는 건물이다.

코르뷔지에는 대형 아파트에 대한 어떠한 참고할 사례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집합주거의 치명적인 단점 즉, 획일성과 탈자연성을 예상하고 한 건물에 다양한 형태의 유니트를 계획하고 건물전체를 땅에서 들어 올려 1층을 필로티화 하였다. 유니트 중에는 복층형도 있다.


다른 기회에 별도로 얘기하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르 코르뷔지에가 천재적으로 제안한 건축원리 속에서 살고 있고 그와 비슷한 유산을 남긴 건축가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런 르 코르뷔지에가 이 걸작이 완성된 후에 이렇게 말한다.

"아파트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죄악이다."


아파트에는 땅과 바람과 비가 주어지지 않는다.

낙엽도 잡초도 주어지지 않고 지구촌 어딘가에서는 근처에 사는 사슴과 곰도 방문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부모나 집에 방문한  손님들과 잠시라도 단절되고 싶을 때는 방문을 잠그거나 집 밖으로 나가버려야 한다. 그 정도로 극단적으로 비치기를 원하지 않을 때에도.


아파트는 극단적으로 동선을 줄여 놓은 공간이다. 편리라는 이름으로.

며느리는 용변을 보러 가는 상황을 거실에 있는 시아버지에게 알리지 않을 수가 없다. 가족들이 집에 있을 때는 친구나  친정어머니와의 전화대화도 어렵다.

부부간에도 서로의 감정상태를 상대가 몰랐으면 할 때가 있는 법인데, 그것이 표정과 행동으로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을 피하기가 힘들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인간은 나를 드러내지 않을 다른 방법을 찾는다는 것이다. 하루 세끼를 햄버거만 먹는 아이의 인성처럼 사람의 심리와 인성은 아파트에 맞춰서 진화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당이 깊은 집'은 그 집 구성원의 감정적 갈등의 씨앗을 발아단계에서 증발시켜 줄 장치를 여러 곳에 설치해 놓은 힐링센터와 같은 곳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보다 더 심각한 아파트의 문제는 그 동네서 자라는 모든 아이들, 더 나아가서 그 시절을 함께 사는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집에서 자란다는 것이다.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우리의 무의식에는 이런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디스토피아의 상황을 묘사하는 미래공상영화를 보면 영락없이 사람들이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다. 거주하는 공간은 말할 것도 없다.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들도 의식주가 획일화되면 디스토피아가 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아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영화를 보면서 저런 세상이 오면 끔찍하겠구나 하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실제로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만 먹으라고 하면 거세게 저항할 것이다. 삶의 다양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소리 칠 것이다. 우리 모두가 똑같은 공간에서 자랐고 여전히 똑같은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잊은 채.


"우리는 건축을 만들고 건축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

윈스턴 처칠이 한 말이다.

그래서 집은 중요하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가족의 주거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 그 가족의 여성 어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어느 교육과정에도  그들에 대한 초보적인 건축교육이 없다.


중학생쯤 되면 가사실습실에서 스파게티 만드는 것체험하고 제 스스로 옷가게에 가서 자기 옷도 골라본다.

전공생이 아니어도 모차르트를 알게 되고 인상파 화가에 대해서 설명도 듣는다.


하지만 누구도 모더니즘 건축의 철학이나 고딕건축과 르네상스 건축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일이 없다.

우리가 다니는 학교와 아파트는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생각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 생각은 무엇인지, 괴상하게 생긴 저 시청사와 구청사는 당신이 보고 온 슈테판 성당과 같은 배경으로 시민의 돈을 거둬서 처바르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뉴욕과 런던의 세련된 부자들이 자신의 거실벽에 대리석을 붙이지 않고 흰 페인트를 칠해서 백색공간(White Architecture)을 만드는  철학적 배경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선생도 없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힘들게 모은 돈을 투자해서 유럽으로 여행을 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베를린 필하모니의 콘서트나 세잔느의 전시회를  일부러 찾아가서 반나절을 보내지는 않는다.

오로지 고딕건축과 르네상스건축만 보이는 길을 돌아다닌다. 가끔은 로마네스크 식의 유적과 바로크식 궁전을 돌아보느라 하루를 소비하기도 한다.

의미를 모르니 감동도 없다. 재즈와 포크송, 록음악처럼 다른 그 건물들의 장르 구분조차 안되니 어쩔 수가 없다.


심지어 20세기초 모더니즘 건축 즉, 지금 우리 모두가 비교적 평등하게 향유하고 있는 건축물을 역사상 처음으로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건축가들의 감동적인 역작들이 길모퉁이만 돌면 있는데도, 사람들은 비엔나에 가면 프라하나 쾰른에서 봤던 것과 다를 게 없는  슈테판 성당만 보고 온다. 그 성당에서 뭘 봐야 좋은 지는 당연히 모른다. 그래서 가이드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작은 에피소드와 디테일을 말해주며 지루함을 없애려 애쓴다. 결코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차이코프스키나 렘브란트를 몰라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집을 모르고 살면 지장이 있다.

집은 햄버거나 김치찌개보다 중요하다.


여전히 아파트는 유용한 주택 보급 방법이고, 심지어 아파트 수준의 주거공간이라도 제공되기를 바라는 환경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알고 행하는 것과 모르고 행하는 것은 다르다.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아파트에서 내 아이들을 키웠다. 많은 면에서 애들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아파트에 살더라도 할 수 있다면 극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장차 그런 행위의 주인이 될 어린 여학생들에게 잠깐이라도 앞에서 말한 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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