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베끼는 것이다.(2)

건축학입문 제3강. 디자인, 어떻게 하는 것인가

by 언덕 위의 건축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라고 말한 것이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피카소가 '훌륭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고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피카소가 구현한 큐비즘이 당시로서는 그렇게 파격적이었는데도, 피카소는 베끼라고 말합니다.

베끼라고 말한 스승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지하광장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의뢰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미 지하철역과 이어져있고 광장 옆에 대형 서점이 문을 열 예정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친구를 기다린다든지 하면서 머무를 것으로 예상되는 지하공간이었습니다.


공간의 규모, 공간 안에서 예상되는 사람들의 행태 등을 고려해서 '① 지하가 아닌 지상의 분위기를 만든다. ② 공사를 자주 할 수 없을 테니, 눈길을 끄는 디자인이 아니라 천연스러운 요소로 구성한다.'라고 방향을 잡았습니다. 이를 소위 디자인 콘셉트라고 합니다.

그다음 할 일은 이를 어떻게 구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디자인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것은 자연광 또는 유사자연광의 도입으로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천장에 이런저런 실험적인 기술을 도입해서 어느 정도 구현했습니다.

두 번째 것이 문제였습니다.

지하광장을 둘러싼 벽의 디자인은 어느 정도 콘셉트에 맞게 구상한 것 같은데, 넓은 광장의 바닥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며칠 끙끙대다가 결국 베끼기의 단계를 밟기로 합니다.


1단계를 거쳐 2단계까지 가도 번뜩하는 영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1단계는 사진 같은 것으로 남의 작품을 뒤져보는 것이고, 2단계는 박물관의 도자기 코너 같이 즉물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형상들을 뒤지러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3단계는 온갖 옛날의 메모, 스케치 등을 동원해서 자기 기억을 뒤지는 것입니다.

실무에서는 보통 이 정도까지 가면 원형탈모증이 생기려고 합니다.

모방을 하든 훔치든 주어진 시간 안에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별짓을 다하다 보니 문득 학생 때 갔었던 한 조각 전시회가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으로부터는 13년 전에 갔던 전시회였습니다.

조각가 강은엽이 1992년에 서미갤러리에서 '時間의 背後(The Other Side of Time)'라는 제목으로 설치작품을 전시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혹시 당시 전시의 사진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없습니다.

하얀 방안에 검은 바위 대여섯 개를 무심한 듯 배치해 놓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강은엽의 다른 작품. '쉼' (2014년)

그때에는 솔직히 작품의 제목에 내 관심이 꽂혔습니다.

당시 나는 어느 공모전에 출품할 작품의 제목 때문에 고민 중이었는데, '시간의 배후'라는 제목을 보고 고민이 다 해결되어서 그 작품 제목을 베꼈습니다. 작품이 DMZ 안에 짓는 남북교류센터(나는 공모전이라고 해도 이런 비현실적인 주제로는 하지 않는 편인데, 주최 측에서 정해 준 주제였음)였기 때문에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뭔가 심오한 뜻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제목 덕분에 상금도 탔습니다.


'시간의 배후'라는 제목은 나중에 시인 김가연의 시집 제목으로도 재활용됩니다.

거듭 말하지만 베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애초에 만든 사람은 조각 작품의 제목으로 썼고, 나중 사람은 건축 작품의 제목으로 또 시집의 제목으로 썼습니다. 창조는 분명 아니지만 활용입니다.


제목에 눈이 멀었었기 때문에 13년이 지난 뒤에 전시 내용은 까맣게 잊었을 만도 한데, 머릿속을 뒤지다 보니까 거기까지 가게 됐습니다.

영감을 얻었고 (아니, 훔칠 물건을 찾았고) 지하광장에 많은 공사비를 투여해서 천연의 바위를 옮겨다 놓았습니다.


학생들에게 베끼기의 3단계를 설명할 때 주로 들려주는 에피소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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