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입문 제3강. 디자인, 어떻게 하는 것인가
'영감을 얻는다고 말하지 말고, 그냥 베껴라.'
훌륭한 골프 코치는, '스윙의 리듬을 더 천천히 하세요'라고 가르치는 코치가 아니라 '오른쪽 신발을 벗고 쳐보세요'라고 가르치는 코치입니다.
먼저 베끼기의 여러 방식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0단계. 다른 건축작품을 '복제'한다.
1단계. 다른 건축작품을 베낀다.
2단계. 건축작품이 아닌 다른 사물을 베낀다.
3단계. 자기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베낀다.
4단계. 형태가 없는 것을 베낀다. 음악이나 시, 또는 자연
5단계. 안 베끼고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
0단계. 다른 건축작품을 '복제'한다.
놀랍게도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건축 공간은 대부분 0단계, 즉 복제품입니다.
조금 너그럽게 봐주자면 0.5단계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파트를 생각하면 됩니다. 나와 내 식구가 살고 있는 공간이 이웃집과 무엇이 다른 지 생각해 보면 됩니다.
가구와 마감이 다르지 않느냐고 반문하신다면, 365일 햄버거만 먹지만 먹을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인구의 절반 이상이 복제된 공간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파트 거주비율은 53%이지만 유사 아파트까지 포함하면 80% 정도가 복제공간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무실이나 학교 같은 다른 건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의실이 8층에 있어서, 학생들에게 창가로 와서 밖을 내다보라고 합니다.
강 건너 잠실과 압구정동에서부터 행당동, 금호동의 언덕을 빼곡히 덮고 있는 수많은 건물들이 보입니다.
"저 수많은 건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건축대학을 졸업하고 라이선스까지 취득한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들이다. 저 중에서 1단계라도 제대로 해서 디자인한 건물은 10%가 안 된다. 나머지는 대부분 '복제품'이거나 0.5단계로 지어진 건물이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카메라를 가지고 저 중에서 한 동네를 가봐라. 그리고 10채의 건물마다 게 중에 차별성이 느껴지는 하나의 건물을 찍어와라. 쉽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거다."
1단계. 다른 건축작품을 베낀다.
말 그대로 좋은 작품을 흉내 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축구하는 선수가 지단이나 메시의 기술을 따라 한다고 해서 누구도 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공하면 박수를 칩니다.
물론 그것은 기술이고 디자인은 예술이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이 아니라 상품이어도 '복제'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럴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세돌의 기보를 수백 장 외워도 절대 똑같은 상황의 바둑이 내게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 올 줄 알아도 이세돌의 기보를 외워야 프로가 됩니다. 이세돌뿐만 아니라 이창호의 바둑도 따라서 둬봐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에게 이세돌 풍의 바둑이 맞는지 이창호 풍의 바둑이 맞는지 알게 됩니다. 또는 새로운 풍이 있다는 것도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 건축작품을 그대로 베끼려고 깊이 있게 분석하고 달달 외워도 똑같은 상황은 절대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대가의 기보에서 돌을 놓는 원리를 배웠다면, 자기의 바둑을 둘 수 있게 됩니다.
2단계. 건축작품이 아닌 다른 사물을 베낀다.
이 단계부터 사람들은 '베낀다'라고 말하지 않고 '영감을 얻는다'라고 표현합니다. 그 말이 그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학생들에게 '베끼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표현만 달리 할 뿐인데 교육의 효과는 다릅니다.
영감을 얻으라고 말하면 학생들은 무언가 능력이 또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그저 베껴라라고 말하면 학생들의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담 없이 자꾸 해보게 만들어줘야 합니다.
나의 경우 자주 사용하는 2단계 베끼기의 대상은 사방탁자나 반닫이 같은 '전통가구'와 '서울의 골목'입니다.
조각작품이나 거리벽화인 그라피티를 뒤적이다가 원하는 것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디자인 주제에 따라 다른 것을 베끼기도 합니다.
3단계. 자기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베낀다.
이 정도의 레벨이면 그냥 온전한 창작행위가 되는 것인데, 억지로 '베끼기'라는 범주에 집어넣는 것 아니냐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머릿속'이 아니라 역시 '베끼기'입니다.
여기서 '베끼기'를 빼버리면 흔히들 말하는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라'는 뜻으로 바뀌어버립니다.
그러면 다시 벽에 부딪히게 되고, 힘들어지고, 재미가 없어지고 공부를 안 하게 됩니다.
'베끼기'에 방점을 두면, 너의 머릿속이 데이터베이스로 작동해서 나중에 무엇이 어떻게 쓰일지 모르니 많이 체험하고, 세밀히 보고, 많이 읽고, 진지하게 사색하고, 지적인 대화를 많이 나눠라는 뜻으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창작자에게 평생을 써먹을 보물 같은 데이터 창고가 됩니다.
4단계는 천재만이, 5단계는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재는 가르치면 안 됩니다. 천재에게 해줄 수 있는 있는 일이라고는, 난간에서 떨어지지 않게 보살피면서 그의 얘기를 들어주는 일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