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입문 제2강. 건축의 요소
라파엘은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서 파리의 명문 국립건축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고 휴학 중인 학생이었다.(1996년에는 프랑스도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그는 입대영장이 나오기 전까지 사무실에서 실습생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담배도 나눠주고 점심도 사주고 해서 꽤 친하게 지냈다.
열정페이조차 없는 무급으로 일하지만, 자신은 교통비라도 받으니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프랑스는 학생 때의 경력도 건축사시험 경력조건에 산입해줘서, 무급이라도 서로 하려고 한다고 한다.
그가 주로 했던 일은, 이미 그려진 도면을 검토해 주거나 때로는 새로 그릴 도면을 스케치해서 주면 그것을 캐드(CAD)로 작성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도면은 실무에서 쓰는 수준의 도면이었다.
그런데 고작 3학년 다니고 휴학한 그가 그 일을 프로처럼 잘 해내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하고는 많이 달랐다.
어떻게 그렇게 실무도 잘 알고 상세도면까지 잘 그리냐고 묻자,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기만큼은 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그가 말한 얘기가 나한테는 꽤 충격적이었다.
"아시아에서 유학 온 학생들은 필수과목만 아니면 가급적 건축철학이나 디자인원론 같은 고상한 수업만 골라서 들어요. 하지만 프랑스 친구들은 그런 것보다는 가급적 실무에 써먹을 수 있는 과목을 주로 들어요. 우리는 졸업하면 바로 사무실에 취업해서 일을 해야 되거든요."
유학을 가보지 못한 나는 유럽의 건축과 학생들이 우리보다 더 고차원적인 것들을 배울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졸업하면 바로 일을 해야하는 것은 한국의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건축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후배는 그 상금으로 독일에 유학을 갔다.
방학 때 들어온 그를 만났더니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졸업을 했는데도 2학년 수료만 인정받아서 3학년을 다시 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독일에서 건축과 3학년들이 뭘 배우고 있는지 알아요?"
내가 알 턱이 있나.
"실제크기로 만들어진 플라스틱 벽돌을 쌓아서 화장실을 1:1 크기로 설계해요. 그게 필수과목이에요."
독일의 대학도 '실제 건축'을 가르치는 것은 프랑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울 동대문에 가면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디자인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있다.
그 자하 하디드를 가르친 사람 중에 가장 영향을 크게 미쳤던 사람은 렘 콜하스(Rem Koolhaas)이다.
렘 콜하스는 훌륭한 교육자이면서 동시에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뛰어난 건축가다.
2000년대에 세계의 건축을 이끌었던 네덜란드의 OMA그룹을 이끌었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가르쳤다.
견해차는 있겠지만 나는 자하 하디드보다 렘 콜하스가 더 뛰어난 건축가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있는 그의 작품은 리움미술관과 서울대학교 미술관이다.
그가 가르쳤던 내용을 책으로 만든 것 중 유명한 것으로 '건축의 요소(Elements of architecture)'가 있다. 말하자면 '건축 단어장'이다.
한 학기 안에 다 가르치기 힘들 정도로 두꺼운 책 안에는, 바닥, 기둥, 지붕, 문, 창 같은 건물을 구성하는 물리적 단위와 화장실, 복도, 발코니 같은 공간적 단위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가 소설을 쓰든 철학책을 쓰든 그 제일 하위의 기초가 되는 '낱말 공부' 책인 셈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NGbmBWte1B0
프랑스와 독일, 네덜란드, 하버드의 현지 학생들은 이런 것을 먼저 배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99년부터 대학에서 학생들을 몇 년 가르치다가 어떤 한계를 느끼게 됐다.
학생들이 낱말의 뜻도 모르면서 의미없는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 학교에서 낱말에 대해 배운 적이 없었고 낱말부터 가르친다는 선생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내 식견이 좁아서 그럴 수도 있다)
사실 '낱말공부'는 1, 2학년 때 배우고 올라와야 할 기초일 테지만, 그런 수업은 없었다. 다른 학교에서도 가르쳐봤지만 다들 비슷했다.
결국 몇 년 후부터는 설계수업의 방향을 바꿨고 지금까지 그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1. 잠깐이라도 낱말부터 가르치자.
2. 그것을 제대로 적용하기 위해서 3학년이더라도 설계 프로젝트의 규모를 줄이자. 즉 짧은 글짓기나 에세이 수준의 프로젝트를 진행하자. 그것으로 충분하다.
전체 스튜디오의 성과물을 모아서 발표하는 학기말 발표회에서는, 우리 반 학생들 작품의 소박함에 동료 선생들과 학생들까지도 실망하는 눈빛을 보내고 때로는 멸시도 한다.
하지만 낱말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나름의 탄탄한 디자인 전개, 건축구조(구조평면도), 재료(재료마감 상세 및 샘플북) 심지어 설비(설비계통도)에 대한 이해까지 포함된 내 학생들의 결과물(도면집)을 그들이 눈여겨본 적은 없다.
그런 것들은 결코 '만화'같이 화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프로젝트는 거대하고 화려하다. 때로는 물위에 서있기도하고 공중에 떠있기도 한다.
뜬구름 잡는 얘기만 심각하게 하면 되니, 선생도 즐겁고 학생도 뭔가 대단한 걸 배우는 것 같아서 즐겁다.
하지만 다시 그런 만화를 가르치기에는 내 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2014년 렘 콜하스가 위의 '단어장'을 책으로 내고, 자신은 이런 것부터 가르친다고 발표했을 때 많은 위안이 됐다.
'내가 잘못 가르치고 있지는 않았구나'
* 낱말을 익히게 하는 방법은 '받아쓰기'만큼 좋은 것이 없다. ('디자인은, 베끼는 것이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