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1일 (D+7)
외래가 없는 날이다. 수술 전 검사를 받는 날이다. 금식을 하고 병원으로 갔다. 회진을 돌고 나니 우리 펠로우 선생님이 약속오더를 봐 달라고 했다. 내 환자들을 내가 진료 보는 패턴과 같이 똑같이 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혹시 놓치는 것이 없는지, 약속 오더에 오류는 없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이 친구가 임상조교수로 남아주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날 병원 로비에서 최종순 교수님을 만나게 하신 일, 융통성을 발휘하게 하신 일이 모두 기적 같았다.
‘맞아. 이 친구가 남게 된 것도 내 계획은 아니었지. 하나님께서 이 이후에도 사람을 보내주실 거야. 내가 인맥이 없지, 하나님이 인맥이 없으시겠어?’
약속 오더를 봐주고, 검사실로 내려왔다. 채혈을 한 후 소변검사를 위해 소변통을 들고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 옆 칸에서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로 보아 연세가 아주 많으신 분이고 손녀와 통화를 하고 계신 듯했다.
“그래 우리 나연이, 같이 기도해야지. 하나님, 우리 나연이 지켜주시고 잘 자라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울먹이시는 그분의 기도를 들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느낌에 아직 손녀가 어린데 따님이 아프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함께 기도했다.
‘하나님, 나연이 지켜주시고, 저 가족을 지켜주세요.’
PET-CT를 찍으러 갔다. 분명히 내 혈관은 통통한데 이상하게 힘이 없다. 귀엽게 생긴 간호사가 절대 실패할 리 없는 혈관에 찔렀는데, 이상하게 피가 안 나온다. 간호사가 당황했다. 바늘을 피부 안에서 살짝 빼서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고 한다. 내가 인턴 때는 응급 채혈과 아침 7시 채혈을 인턴이 했다. 그래서 많이 해봤는데, 사실 저렇게 안에서 돌려도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다 못한 내가 한마디 했다.
“그냥 빼고 새로 해도 돼요.”
“교수님 죄송해요.”
괜찮다는데도 너무 미안해했다.
‘에구…. 내가 교수라서 긴장했구나. 안 아프게 해주려고 하는데 잘 안되니 얼마나 당황했겠어.’ 싶었다. 이상하게도 반드시 잘해야 된다 생각하면 잘 되던 것도 안된다.
“괜찮아요. 이건 얇은 바늘이라서 괜찮아요. 내가 원래 워낙 혈압이 낮아서 피가 잘 안 나와요.”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얼마나 힘들까. 유방암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그쪽 팔의 혈관은 사용을 할 수가 없다. 그럼 나머지 한쪽 팔의 혈관만 사용해야 되는데, 치료받으면서 점점 혈관은 쪼그라든다. 겨우 몇 줄기 남은 혈관들은 이미 여러 번 찔려서 터지고 멍들어 있어 성한 곳이 없다. 인턴 때 그런 환자들의 채혈을 했다. 아침 회진 시간에 오늘 항암제가 들어갈지 결정하려면 그날 새벽에 채혈을 해서 회진 전에 결과가 나와있어야 했다. 채혈할 때 한 번에 성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마도 나는 수술로 치료가 끝나고 항암치료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만약에 항암치료를 받게 된다면 얼마나 힘들까를 생각해 보았다. 항암치료 중인 많은 분들과 항암치료를 시작한 J양이 힘을 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PET-CT는 방사성 물질을 주사 맞고 한 시간을 기다린 후 사진을 찍는다. 그래서 환자들은 주사를 맞고 각자의 대기실 방에 누워서 한 시간을 기다린다. 깜빡 잠이 들려는 찰나 옆방에서 찬양하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찬양 소리가 커졌다.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였소.”
아무도 조용히 하라는 사람이 없었다. 그 순간 모두 마음속으로 함께 그 찬양을 부르고 있었으리라. 저분은 무슨 암일까? 저분은 얼마나 더 살게 되실까? 저분은 무엇이 감사할까?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는 그 믿음이 감사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환자를 지켜 주시기를 기도했다.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화장실에서의 일도 그렇고 지금 이 찬양도 그렇고 이곳이 복음병원인 것이 이토록 실감 날 수가 없었다. 전국에 40개 의과대학과 대학병원 중에서 이런 병원이 하나쯤 있는 것도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복음병원을 지켜주세요. 이렇게 화장실에서도 기도하고 검사실에서도 찬양하는 것이 당연한 병원, 그런 대학 병원이 하나쯤은 있는 것도 괜찮잖아요. 복음병원이 바르게 최선을 다해 진료할 수 있도록, 하나님 사랑하는 의료진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검사를 마치고, 학교에 병가 원서를 제출하고 병원에서 나왔다. 엄마랑 밥을 먹기로 했다. 엄마랑 밥을 먹다가 또 사소한 일에 짜증을 부렸다. 늘 그랬다. 너무 사랑해서, 반드시 잘 되기를 바라서, 그렇지 하지 않았으면 안타까워서, 서로에게 싫은 소리를 한다. 엄마와 딸. 서로 세상에서 가장 잘 되었으면 하는, 그래서 물러설 수가 없는 존재, 그래서 꼭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했으면 하는 것이다. 엄마는 감사하다면서도 자꾸 우셨다. 속상해서 자꾸 짜증이 났다.
‘하나님 우리 엄마보다는 오래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식사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마음에 드는 회색코트를 딱 만났다. 사실 내 마음속에는 내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벌을 받는 것인가 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그렇게 하나님만 사랑하고 욕심 없이 살겠다고 해놓고, 있는 코트 놔두고 회색 코트 가지고 싶은 마음, 성경은 안 보고 내 얼굴만 들여다보며 성형수술 하고 싶은 마음, 그런 허영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어서 혼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런 거 아니야. 너 이거 필요하지?’
하나님은 너무 좋은 분이다.
은혜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고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손경민의 '은혜' 찬양 링크입니다.
https://youtu.be/pZuW2CV0mXY?si=TSYEjtOsDUibcjl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