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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Sep 08. 2023

야나할머니와 삐라

삐라 이야기 주절주절

지금 살고 있는 이동네로 이사를 왔을 때 가장 신기했던 것은 정수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것이었다.

'서울이 가까우니 비행기도 보이는구나?' 나는 이 사실을 신기해는 하는 내가 웃겨 피식 웃었다.

큰 아이의 두 돌 무렵, 다세대 주택 1층에 살았던 나는 아이의 이브자리를 털려고 안방 유리창을 열었고 엄마의 부산스러움에 함께 움직이던 아이는 그 작은 창을 통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고선 그 무렵 신이 나면 보여주던 특유의 만세 자세를 하고선 깡충깡충 신나게 폴짝거렸다.


"엄마 비행기야 비행기"


우리는 매일 같이 비행기가 지나가는 시간을 기다렸고 볕이 좋은 날엔 안방 창문을 방충망까지 활짝 열고 비행기를 보았다. 그때 생각했던 것은 이렇게나 좋아하는 비행기를 직접 태워주면 얼마나 좋을까? 였지만 애석하게도 십 년이 넘도록 그 일은 실현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




스무 해가 가깝도록 여전히 이 동네에 살고 있는 나는 천정부지 치솟는 전세금에 쫓겨 이사를 다녀야 했고 재밌게도 지금 살고 있는 집 지붕 위로는 매일 같이 출퇴근을 하는 군용 헬리콥터가 지나다니는데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정확한 시간마다 유리창을 덜덜 떨게 만들어 주어서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간을 알 수 있는 경지가 되었다.


얼마 전의 퇴근길.

예전에 살던 집 근처에 뻗어 있는 탄천길을 따라 걷다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아이가 어렸을 때 보고서 깡충거리던 그 비행기 길로 여객기가 날고 있었다. 공항이 제법 가까워지니 고도를 낮춰 비행 중일 거라 생각했지만 한껏 푸르러진 하늘빛 때문인지 비행기가 유독 반짝 거리며 눈으로 들어왔고 어디 여객기인지 맞춰보려고 했지만 요새 너무도 좋아진(?) 노안 덕분에 망설임 일도 없이 포기를 하다 문득 중학교 일 학년 때 만났던 비행물체가 떠올라 기억을 소환하며 남은 길을 걸었다.




앙상하게 남아 있던 마른 가지에 작은 촉이 보이고 그 작은 촉에서 마법처럼 연두색 이파리가 조금씩 나오고 있던, 정말 하루하루가 다르게 주변의 경관이 변해가던 어느 봄날.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집으로 향하고 있던 나는 산 위로 어떤 물체가 떠가는 것을 발견했는데 거리를 가늠해 크기를 짐작한다면 그 물체는 굉장히 큰 물체일 거라는 결론을 친구들과 내리고 있었다.


"야들아 저게 뭘라나?"


"바람에 비니루 같은 게 날아가는 거 아이나?"


"나는 사람이 띄운 큰 풍선 같은데?"


"밑에 연결된 줄 같은 건 안비제? 그럼 그냥 바람 따라 날아가는 건데 저게 뭘까?"


"그러지 말고 우리 한 번 따라가 볼까?"


"야 니 미친 나? 저게 어디로 어떻게 날아갈 줄 알고. 그리고 산 위로 날아가는데 우리가 뭔 수로 저걸 따라가나?"


"그럼 우리 지서에 신고할래? 뭐 이상한 게 날아간다고"


"야 아서. 지서에 있는 최경장 그 시끼 완전 또라이야. 니 못 봤나? 그 최경장이 지 허리에 차고 있던 까만 곤봉으로 종태 오빠 막 후두리 갈기던 거"


"야 접때 니랑 나랑 같이 봤자네. 여가 암만 시골이어도 경찰이 폭력을 쓰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나는 최경장한테 꼭 복수를 할 참이여"


친구들은 복수할 거란 내 얘길 귓등으로 듣는 듯했고 우리는 점점 멀어져 가는 물체를 궁금해하며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야야 누가 읍나?"


"할머이 다녀오셨어요. 오늘은 저물게 오싰네"


"야나 니 이거 뭔지 볼라나? 내가 이거 줍느라고 저물게 왔자네"


할머니가 꺼내 보이신 것은 김일성 찬양문구들로 도배된 삐라였다.


"할머이 이거 삐라자네"


"이게 삐라라고? 왜 여태 보든 거랑 다르게 생깄노? 난 무슨 부적인 줄 알았네"


"지들도 잘 안 찢기고 마이 날아가는 좋은 종이로 새로 맹그렇겠지. 근데 할머이 어서 이래 마이 줏으싰대?"


"야야 니 내 얘기 좀 들어볼래? 내가 오늘 신데이 넘어 큰골 산에 있는데 하늘에 뭔 흰 봉다리 같은기 둥둥 날아오는기라. 나무 끝에 걸렸다가 바람 불믄 또 날아가고 또 나무에 걸렸다가 날아가고. 그러다가 안 비길래 그쪽 너매로 가봤지. 그랬더니 이 종이가 산에 한가득 떨어져 있는기여. 가매이 보니 삐라 같기도 하고 부적 같기도 하고 무시운 생각이 들어서 우선 이맨큼만 줏어왔지"


"내가  학교 다녀오다 본 봉다리를 할머이도 본거여?그게 말로만 듣던 삐라 풍선이라니. 어쨌거나 할머이 덕분에  내일 지서에 가믄 볼펜이나 연필 많이 받을 수 있겠다."




다음날 나는 할머니가 주워오신 삐라를 동네 여자친구들과 스무 장씩 나눠 갖고 지서 앞으로 가면서 연필 말고 볼펜을 받기를, 까칠한 최경장 말고 볼펜을 덤으로 더 쥐어주는 한순경이 있었으면 하는 주문을 넣으 찾아갔고 우리가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는지 지서 안에서 근무를 하던 최경장과 한순경이 밖으로 나오더니 우리 손에 쥔 삐라를 보곤 최경장이 우리들에겐 간이 초소로 가라고 손가락을 까딱, 한순경에겐 알아서 처리하라는 눈짓을 하고 지서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또 이 삐라네. 너희 어디서 이렇게 많이 주웠니?"


친절한 한순경이 생글거리는 얼굴로 서랍을 열어 수첩을 꺼내 우리 이름을 적으며 물어왔다.


"산에서요"


"하나 둘 셋... 아이고야 많기도 하다. 오늘 이 삐라를 들고 온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한 사람한테 볼펜 한 자루씩 밖에 못주기로 했으니 다음에 볼펜이 많이 들어오면 그때 더 줄게. 오늘은 이것만 받아서 가라"


한순경은 우리에게 볼펜을 한 자루씩 쥐어주었고 적어도 볼펜 한 다스를 받을 거라 호언장담하며 지서를 찾았던 나와 친구들은 괜히 한꺼번에 왕창 갖다 주는 실수를 했다며 다음부터는 하루에 한 장씩만 갖다 주기로 이를 갈며 집으로 돌아왔다.


"우와 할머이 오늘도 삐라를 이래 마이 주우싰네?"


"오냐. 오늘 간 산 골짜구에도 수두룩 하드라. 물에 빠진 건 냅두고 마른 것만 주워왔지"


"할머이 야 줍느라 괜히 기운 빼지 말고 걍 냅두시. 지서에 볼펜 없어서 삐라 갖고 가도 주지도 않어"


"그렇다고? 내 니 공부하는데 볼펜이라도 받으라고 열심히 주스왔두만 이젠 냅두야겠네"




산골의 평범한 일상은 하루하루 지나갔고 약방에 할머니 심부름을 다녀오던 나는 곤색 제복을 입은 최경장이 까만 봉을 들고 종태 오빠를 퍽퍽 소리 나게 매질하고 있는 것을 또 보았다.


'뭐 경찰시끼가 저따구야. 이걸 어디다 신고를 하면 좋을까?'


집에 오는 내내 생각해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경찰서에 전화를 할까? 군청에 전화를 할까? 청와대에 전화를 할까? 답답하고 무거운 맘으로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벌컥벌컥 물을 마시다 턱으로 흐른 물을 닦으려 휴지에다 손을 뻗던 그 순간 그 옆에 초롱초롱 빛나고 있는 하얀 전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아하 맹추!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나는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씨익 웃었고 물을 닦은 뒤 목소리를 점검했다.


"아아, 아아, 하나둘하나둘 흠흠"


그리고 112가 아닌 외우고 있던 지서 전화번호를 또박또박 눌렀다.


"OO지소 경장 최 OO입니다."


"나는 폭력이 싫어요"


그리고 전화기를 쾅 소리가 나도록 끊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나는 친구네 집에서 친구랑 웃음을 참아가며 몇 차례, 그리고 집에 아무도 없을 때에 전화를 걸어 한순경이 아닌 최경장이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나는 폭력이 싫어요"


라고 목소리를 변조해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지서 앞을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하게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녔고 행여나 최경장과 눈이 마주치면 가자미 눈을 하고 쳐다보았다.




최경장에게 매질을 당했던 종태오빠는 나보다 한 학년 위였는데 머리가 아픈 오빠였다.

누구는 오빠가 노는데 염소가 타고 넘어가서 놀라서 미쳤다고도 했고 누구는 머리에 병이 있어서 아프다고도 했고 누구는 오빠가 귀신이 씌었다고도 했는데 오빠는 내 제기와 본인의 제기가 바뀌었다고 억지를 부리며 나에게 연탄재를 던지긴 했지만 평상시에는 그냥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그런데 한 날 오빠가 무슨 이유에선지 최경장에게 욕을 하면서 달려들었고 최경장은 그걸 방어한답시고 곤봉을 휘둘렀는데 종태 오빠 부모님도 아무 소리 안 하고 종태 오빠 형들도 아무 말하지 않는 것이 어린 내 눈엔 너무도 부당하고 바보 같다고 느껴졌다. 그 뒤로 최경장에게 꽂힌 종태 오빠는 종종 지서를 찾아가 시비를 걸었고 그때마다 매질을 당하고 돌아왔는데 중학교 선생님들도 종태오빠 건들면 피곤하니 길에서 만나면 피해 다니라고 종례 사항으로 전달하셨고 결국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종태 오빠는 경북에 있는 시설로 옮겼다는 소문만 무성했는데 아줌마도 오빠들도 아들과 동생의 면회를 간다는 말도, 다녀왔다는 말도 아무도 듣지 못했다며 다들 쉬쉬하는 까닭에 더 이상 아무도 종태 오빠 얘길 꺼내지 않았지만 나는 뾰족하고 사납게 생긴 최경장을 볼 때마다 종태 오빠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되자 할머니는 산나물에 덤으로 삐라를 또 주워오셨고 나는 삐라를 한 장을 들고 갈 것인지 열 장을 들고 갈 것인지를 고민하다 한날은 몽땅 갖다 주거나 아궁이에 넣어 버리거나 둘 중의 하나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친구하고 자전거를 타고 지서엘 갔고 다행히 한순경 아저씨가 지서 앞에서 유리창을 닦고 있었다.


"너희들 어디 가니?"


"아저씨 보러 왔어요. 삐라 낼라고"


"할머니가 또 산에 다녀오셨구나?"


"네"


한순경 아저씨는 내 손에 든 삐라 뭉치를 받더니 초소로 들어가 한참을 주섬주섬거리다 나오셨다.


"너네 지나가면 주려고 계속 뒀던 건데 때마침 임자가 왔네"


아저씨가 건네신 것은 볼펜 두다스였다.


"전에 못주신 거 이자까지 쳐서 주시는 거예요? 근데 오늘은 왜 최경장 아자씬 안비요?"


"아 소식 못 들었구나. 최경장님 발령 나서 OO경찰서로 들어가셨어"


"아 진짜요? 그럼 아저씨도 곧 가시겠네요?"


"나야 뭐 가라 하면 가는 거고 오라 하면 오는 거고. 최경장님이 경찰서로 가서 지서로 장난 전화한 범인 잡겠다고 들어가셨어."


한순경 아저씨가 그 말을 하자 친구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나도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혹시나 더 있다간 꼬리가 밟힐 거 같아서 나는 친구들과 잘 나눠 쓰겠다고 인사한 뒤 도망치듯 집으로 달리다 한적한 길에 들어서자 자전거에서 내렸다.


"야, 최경장이 진짜 나 잡으러 오는 건 아니겠지?"


"니 바보나. 경찰이 한가하게 그런 거나 조사하고 다니게"


"근데 아까 말하는 느낌이 범인이 난 줄 아는 거 같지?"


"나도 살짝 떨렸어. 근데 죄는 최경장이 먼저 진거 아니야. 미성년자인 학생을 곤봉으로 때렸으니 그게 더 큰 죄일 거 같은데. 우리 쫄지 말자"


다행히 최경장이 나를 잡으러 오는 일은 없었지만 감히 상상도 못 한, 우리 아빠에게 형님 형님하며 살랑거렸던 한순경이 아빠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고 도시로 가버렸다. 아빠는 을마나 돈이 없었으면 경찰이 돈을 떼먹고 갔겠냐고 웃으셨지만 나는 생글거리며 볼펜을 다스로 주고 떠나던 그 친절함에 뒤통수를 맞은 건 아빠였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오래 살고 볼일.

나의 이십 대 초반. 나는 한순경 아저씨를 대학교 앞에 있는 파출소 근처서 우연찮게 다시 만났다.

직업적 특색인지 아저씨도 나를 단숨에 알아보셨고 아버지는 잘 계시냐고 물으셨는데 차마 "떼먹고 간 돈 주세요"는 말하지 못했는데 본인의 명함을 주시면서 아버지한테 전하라고 하셔서 전했더니 아버지는 명함을 물끄러미 들여다만 보시고 나만큼 신기해하진 않으셨다. 언젠가 보게 될 인연이면 또 보게 될 거라고.

한순경 아자씬 계속 경찰로 근무를 하셨다면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셨겠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그날 잠깐 만난 아저씨는 그렇게 건강해 보이지도 행복해 보이지도 않아 보였다.




요새도 삐라가 날아오는지 모르겠다. 가끔 뉴스에 뭐를 담아 보냈다 시끄러운 기사를 본 적은 있지만 내가 직접 산에서 주운게 너무도 오래전 일이라 아마득한 옛날이야기처럼 되어 버렸다. 그래도 공부 잘하려면 연필을 잘 쥐고 글씨를 잘 써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며 그 연필과 볼펜을 더 쥐어 주고 싶으신 맘에 산에서 열심히 삐라를 주워다 주셨던 할머니 모습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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