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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Sep 24. 2023

야나할머니와 우렁이

동글동글 우렁이와 기억 방울방울

요즘 들어 부쩍 입맛이 달아난 고삼이 언니는 요구르트 한 모금 과일 몇 입을 먹고선 씻는다고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그런 아이 뒷모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나를 보며 남편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배를 곯는 세상도 아닌데 왜 자꾸만 못 먹여서 그러냐고, 애한테 지나친 관심을 끄라고 주문을 해왔지만 나는  달이 넘도록 피로골절로 지쳐 있는 아이가 뭔가 든든히 먹지 않으면 더 탈이 나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에 이 모든 상황을 알지만 남일 얘기하듯 말하는 남편을 향해 가자미 눈을 장착하고 레이저를 쏘았다.




다음날 퇴근길 마트에 장을 보러 갔는데 뉴스 기사 여파인지 수산물 코너엔 예전처럼 사람들이 몰려 있지 않아 한산했지만 주부인 나도 신경이 전혀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좋아하는 재료로 한 끼 맛있게 해 먹이고 깔끔히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수산물이 최고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어서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여유 있게 수산물 진열장 앞에성거리다 첫눈에 들어온 이것을 덥석 집어 집으로 왔다.


"엄마 나 왔어"


"어 일찍 왔네?"


"히히 비 하나 말해줄까? 킥고잉을 타고 왔"


"어쩐지 빨리 왔더라니. 왜 자꾸 자전거를 타. 걸어 다니지"


"걸어오려고 했지. 그런데 학교 앞에 자전거가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딱 서 있는 거야.  그래서 씽씽 타고 왔지. 근데 엄마 뭐 만들어?"


 "안 가르쳐주지"


"된장찌개 냄새 같은데 뭔가 미묘하게 다른 냄새가 . 엄마 뚜껑 열어봐도 돼?"


"뚜껑 열면 괴물이가 펑하고 튀어나온다."


"이 조그만 뚝배기에서 나와봤자지"


"너 뚝배기 작다고 지금 무시하는 거야? 잘 생각해 봐  지니도 주먹만 한 램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아이는 뚝배기 뚜껑을 살짝 열어보았다.


"어 우렁 된장이네. 엄마 나 이거 먹고 싶은지 어떻게 알았어? 역시 엄마는 내 맘을 잘 안다니까"




그 연못엔 아직도 우렁이가 살고 있겠지?


"야야 니 내하고 우뤠러 안 갈래?"


"할머이 우렁이 잡으러 갈라고? 어디로 갈 건데?"


"저 해고개 밑에 연못에 우뤠이가 그래 많다드라."


"근데 할머이 거기 물이 너무 깊어 위험하다고 그랬는데"


"깊은 데꺼정 할라고 드가. 연못 가새이에 있는 갈대에 붙은 우뤠이만 따오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도 뼛속까지 녹아 뿜뿜 솟구치수렵과 채집을 향한 나의 본능과 호기심을 자극한 할머니의 솔깃한 제안은 이미 나를 연못가에 데려다 놓았고 낯선 물가에 가는 일이라 동생들에겐 비밀로하고 집을 나섰다.


 "아이고야 우뤠이가 새끼를 한가득 씰어놨네"


연못에 도착한 할머니는 짚고 가신 지팡이로 갈대숲을 이리저리 들춰보셨는데 거기엔 시커멓기도 하고 초록색을 띠는 우렁이가 꽤 많이 붙어 있었다.


"할머이 어떤 거를 따야 해?"


"마큼 다 따지 말고 요맨한 것만 따서 느래이"


할머니가 보여준 사이즈는 오백 원짜리 동전보다는 조금 더 큰 사이즈였고 보물찾기 하 듯 재미와 흥을 돋궈주는 탁구공처럼 큰 것도 있었다.


나는 연못을 따라 동그랗게 돌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우렁이를 따서 넣었고 할머니는 연못 바닥을 긁고 있는 녀석들을 지팡이로 끌어내 풀숲으로 던져 내고 계셨다.


"야야 고매 집에 가재이. 너머간대이"


"할머이 왜? 힘들게 여까지 왔는데 쫌 더 잡고 가자"


 "이잉, 지금 훤한 거 같아도 해가 금방 즈. 집꺼정 가다보믄 날이 물어"


그러고 보니 불과 조금 전 보다 해가 서산으로 많이 기운 것이 보였다.




잡은 우렁이를 보니 쌀바가지로 하나는 될 것 같았다. 나는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처럼 무거운 우렁이 포대를 이손에 들었다 저손에 들었다를 반복하며 집으로 돌아갔고 할머니는 대야에 우렁이를 모두 담아 깨끗한 물이 나올 때까지 벅벅 소리가 나도록 비벼 씻으시곤 더 큰 대야로 덮어 두셨다.


"할머이 저거 언제 먹을 수 있어?"


"언제 긴 우뤠이가 깨끗해져야 지"


나와 동생들은 대야 안에서 달팽이처럼 긴 촉수를 내밀고 꿀렁꿀렁 움직이고 있는 우렁이를 구경하려고 자꾸만 대야를 들췄다 덮었다를 반복하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뒤 학교에 다녀온 나는 고곳간 연탄불 기차 맨 앞칸에서 냄비 뚜껑이 들썩거리며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과 마당 구석 삼태기 안에 우렁이 빈 껍질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할머이 근데 냄비에  쪼맨한우렁이여?"


"오이야 그게 우뤠이다."


"왜 이래 쪼맨해졌어?언제 이걸 다 깠대? 나도 까보고 싶었는데"


"언제 까긴. 낮에 니 핵교 갔을 때 내 다 깠지"




보글보글 우렁 된장


퇴근을 한 남편이 저녁상에 와 앉자 뚝배기를 내어오며 내가 말했다.


"자 요즘 수산물이 좀 불안하긴 하지만 이건 바다에서 온 거 아니고 논에서 왔어. 그러니 걱정 말고 먹어도 됨"


"어디 논에서 왔는데? 저기 바다 건너 논에서 온 거 아니야?"


"비행기도 배도 안 타고 차 타고 왔어. 차 타고. 어떻게 포장 봉다리 갖다 보여줘?"


"그렇게까지 발끈할 것 까지야. 그러니까 더 수상한대?"


오늘도 이미 나의 반응을 예상한 남편이 놀리 듯 말했다.


"엄마, 두부랑 우렁이랑 부드러워서 맛있네. 근데 조금만 덜 짰으면 좋았을걸"


"된장을 덜 넣을걸 그랬나 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젤 늦은 거라두만 이미 늦었네. 다들 은혜로 먹어 은혜로"


가족들은 우렁 된장에 양배추 쌈을 해서 서로의 우적우적 씹는 소리를 곁들여 식사를 마쳤고 모처럼 성의 있게 밥을 먹는 아이 모습에 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어릴 적 연못이나 저수지, 논에서 만난 토종우렁이는 새끼를 꼬옥 품고 있다 입으로 한 마리 한 마리 토해내 키워내는 것에 비해 논우렁이는 주황빛깔의 알을 주렁주렁 다닥다닥 낳아 부화할 때를 기다렸다. 그 시기가 되면 그 알을 맛보려고 새 떼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고 사마귀나 메뚜기 이름 모를 벌레들도 주렁주렁 매달려 방해를 했지만 그 와중에 기특하게도 끝까지 살아남은 우렁이 알들이 부화가 되어 논을 지켰다.


하지만 품앗이 꾼들의 손을 거쳐 심어지던 어린 모와 낫질로 베어지던 나락들을 대신해 기계가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논에 살던 우렁이들이 깨지고 망가지면서 어느 순간 우렁이는 논에서 슬그머니 사라졌고 주변의 밭이나 논에 뿌리는 비료나 농약들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게다가 요지부동인 나락 수매가에 지친 농부들은 논농사 대신 논에 흙을 채워 한 번 심으면 몇 년을 버틸 수 있는 인삼이나 약초, 과실수를 심는 업자에게  을 빌려주면서 봄이 되면 물이 채워지고 엄마소가 아버지의 구호 소리에 맞춰 열심히 삶던, 짙은 코코아를 한 잔 타 놓은 것 같던 논엔 나무 말뚝이 박히고 천막이 쳐졌고 개구리 가족들이 밤 새 음악회를 열고 올챙이 유치원이 개원해 꼬물이들이 바글바글 모여 놀던 뜨뜻했던 논은 어느 순간 나의 기억 속에만 머물게 되었다.




어린 날 우렁이만 쏙쏙 골라 먹던 나를 떠올리며 둘째의 식성은 어쩜 나를 이렇게 빼다 박았는지 푸훗 웃음이 다.

지금이야 이렇게 손질이 잘 되어 나오기라도 하지 그 시절 토종 우렁인 손질을 꼼꼼히 해서 먹지 않으면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뿌직 뿌직 알을 씹는 경우도 있어서 할머니는 우렁이도 다슬기도 알이 차는 시기가 되면 잡으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나는 그 규칙이 알아듣기도 어렵고 외우기도 귀찮아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던 것도 떠올랐다.


살다 보니 삶의 지혜가  담긴 할머니의 말씀들지나친 노파심이라고, 나는 몰라도 된다고 귓등으로 들었던 일들이 후회가 된다.

살다 보니 엄마의 얘기들을 그저 잔소리라고, 엄마는 몰라도 된다고 말대답하며 귓등으로 흘렸던 일들이 떠올라 죄스러움이 된다.

살다 보니 남편의 걱정을 외면하려고 했던 나의 무심함이 유난히도 헐렁해 보이는 메리야스를 입고 모로 누워 잠이 든 남편의 등에 박혀 있는 것 같아 애잔한 맘이 다.


그리고 역시 짠 음식엔 장사 없다.

가족들이 시간차를 두고 교대로 물 마시러 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오늘은 여러모로 반성의 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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