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많이익게 하려면 벌들과 개미와 바람과 구름, 햇살이 얼마나 바빴을까?맘으론 한 알 한 알 정성스럽게 수확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갑바를 깔고 장대로 털기로 했다.
"할머니 잎이 많이 떨어지는데 어떡해요?"
외할머니를 도와 앵두 따기에 나섰던 작은 아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주춤하고 있었다.
'괜자네. 잎은 골라내면 되니 싱가지껀가지를 쳐"
아이가 힘 있게 장대질을 할 때마다 갑바위엔 후드득후드득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빨간 구슬이 한가득 떨어졌다.
"엄마 앵두 다 땄는데 이걸로 뭐 할 거야?"
"앵두술 담글 거야"
"술을? 설마 엄마가 먹으려고?"
"아이고야 이 마한 것, 앵두를 을매나 먹었능가 씨를 한바가지 싸놨네"
변소에 다녀오시던 할머니가 우습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익기 바쁘게 따 무이 올핸 술 댐글 앵두도 없겠잖나?"
나는 어제 앵두나무에서 실시간으로 따 먹다가 씨를 뱉는 것도 귀찮아 꿀꺽꿀꺽 삼켰던 일을 떠올렸고, 할머니는 올해도 빨간 앵두술을 담그시려나보다.
앵두술이 잘 익으면 노나 드릴게요
6월이 지나고 7월이 시작되었다.
앵두술이 보리수청 색만큼 고운 빛깔로 익어가고 있고, 하루하루 고운 색으로 변해가는 유리병을 들여다보다 나는 훌쩍 또 그 시절로 날아간다.
어린 시절 입도 맘도 심심했던 나는 할머니 방에서 이쁜빛깔로 나를 홀리고 있던 빨간 앵두를 건져 먹기로 맘먹고, 두 발로는 술병을 잡고 젖 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서 간신히 술병 뚜껑을 열었다. 그리곤흐뭇하게 앵두를 국자로 건져 먹으려고 고개들 들이밀던 순간 코를 찌르며 아찔하게 올라오던 강렬한 술 냄새에 놀랐지만 통통하니 먹음직해 보였던 앵두는 괜찮을 거라고 의심치 않고 입에 와작 털어 넣었는데, 태어나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맛없고 강렬한 맛에 부리나케 수돗가로 가 입을 여러 번 헹궜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뚜껑을 닫고 병을 제자리에 두었고, 그날 산에서 돌아오신 할머니한테 아무래도 앵두술이 썩은 거 같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할머니 몰래 술병을 연 것을 나 스스로 실토하는 것 같아서 입을 꾹 닫고 있었다. 하지만 방에 들어서자마자 할머니는
"누가 또 시키지도 않은 저지레를 했나? 니가 그랬제?"
"히히, 할머이 우뜨케 알았어?"
"마한 것, 호래이를 쏙이지"
할머니 목소리가 화가 많이 나신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니까 할머이 우뜨게 알았는데?"
"우뜨케 알긴. 방에 이래 술냄새가 진동하는데 이걸 모리나?"
"근데 할머이 앵두술이 썩은 거 같애. 맛이 너무 엄써"
"담엔 술빙 아무 때나 열지마래이. 오늘은 벌로 할미방 소지해"
나는 할머니 방을 쓸고 닦았다.
과실주는 쓰고 뒤끝이 있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서인지 도수 높은 담금주를 사서 부으면서도 이게 잘하는 짓인가? 싶다.
신기하게도 야나할머니 글을 쓰면서 우리 집엔 유리병이, 담금주가, 약초 발효병이 하나 둘 늘고 있고, 귀촌을 꿈꾸는 나는 예행연습 중이다 하고 있다. 출산 예정일을 세던 때처럼 날을 세서 청을 뜨고,오미자와 매실청을 나눠 드렸는데 지인들이 너무도 고마워하셔서 오히려 드린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맘만 먹으면 마트에서, 낼 아침이면 쿠팡에서 가져다도 주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담근 정성을 귀히 봐주신 분들로 나는 담그고 발효시키는 재미에 점점 빠져들고 있다. 아마 할머니도 이런 마음에 항아리를 채우고 비우시지 않으셨을까? 짐작해 보는 밤이다.
처음으로 담가 본 앵두술은 어떤 맛을 보여줄지 기대도 되고, 실패하면 어쩌나 걱정도 되지만 부디 빨간 구슬이 요술을 부려주길 주문 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