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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Dec 16. 2023

야나할머니와 효자손

효자손의 삐뚤어진 용도를 후회하며

"살려줘! 누가 나 등좀 긁어줘"


"으휴 엄마, 그러지 말고 바디로션을 푹푹 발라. 피부가 건조하니깐 그렇잖아. 나도 긁어주고 싶은데 화장실이 급해서 이만"


손이 닿지 않는 등이 가려워 몸을 베베꼬고 있는 나를 보고선 작은 아이는 화장실로 사라졌다.


"마한. 긁어주도 않을 거면서 잔소리는"


"이리 와봐. 당신이 아무리 구박해도 등 가려울 때 긁어줄 사람 나 밖에 없지?"


남편이 웃으며 등을 손바닥으로 슬슬 쓸어주곤 탕탕 소리가 나게 쳐 주었다.


"아니 그렇게 하지 말고 손 넣어서 박박 긁어달라고"


"좀 참아봐 가려운 걸 가라앉혀야지. 세게 긁음 피부 올라와 더 가려워져"


"어쩔 수 없이 조만간 효자손 하나 산다.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어"




사무실의 효자손

'아 큰일이네. 등이 너무 가려운데 어떡하지?'


점심을 먹고 자리에 앉았는데 등이 자꾸만 근질근질거린 느낌이 들었다. 음식물도 섭취하고 이리저리 움직여서 몸이 데워져 또 등이 가려운 건지, 작은 아이 말대로 건조해서 그런 건지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해하며 서랍을 열었는데 갑자기 30cm 자가 눈에 들어왔고 나는 슬쩍 주변을 돌아보고 사람들이 나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 자를 꺼내 등을 긁었는데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원함이었지만 내가 사무실의 노인이 된 거 같아 오래 즐길 순 없었다.




할머니 방에 들어서면 방문 오른쪽엔 낮은 상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상 위 벽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작고 뿌연 사각 거울이 하나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박힌 검은 못엔 반질반질한 효자손 하나와 오랜 시간 할머니의 까만 염색약 흔적을 뒤집어쓰며 살아온 새빨간 자루 빗이 한 개 걸려 있었는데 할머니는 매일 아침 뿌연 거울 앞에서 빨간 빗으로 긴 머리를 빗어 똘똘 말아 비녀를 찌르셨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뿌연 거울은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던 것 같고 머리 손질을 끝낸 할머니는 규칙처럼 효자손을 들고 등을 벅벅 소리가 나도록 긁으셨는데 내가 효자손을 처음으로 써 보았던 날 등을 긁던 아픈 느낌에 소리를 질렀었고 저러다 할머니 등에서 피가 나지 않을까? 걱정도 했었다.


그렇게 사계절 또 사계절매일 같이 할머니와 함께한 효자손의 굽은 대나무살은 반질반질 닳아 있었고 넓적한 손잡이엔 손 때가 묻어 누렇게 색이 변하고 홍보 문구로 쓰여 있던 '청풍명월관광' 글자는 인쇄가 벗겨져 무슨 글자인지도 알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OO이 있나? 야야 이리 와 본나"


"할머이 내 여 있는데 왜? 우웩 할머이 파스를 을매나 바른기여. 눈 시리 죽겠네"


할머니 방에 들어서다 말고 나는 코와 눈을 습격한 강력한 파스냄새에 코를 막고 코맹맹이 소리로 할머니에게 구시렁거렸다.


 "니 내 등에 파스 좀 발라다오"


"할머이 지금도 눈이 이래 시린데 파스를 등에 다가도 바르라고? 등이 따가울낀데"


"내 살은 안 따구우니 걱정 말고 거 날갯죽지 있는데 밑으로 살살 발라보래이. 이게 등도 들 아프고 들 개룹고 십상 좋아"


"등이 개루우면 나한테 긁어달라고 하믄 되지"


"니가 만날 밤에 자다 말고 와서 내  등 긁어 줄 끼나?"


"혹시 알아. 자다 깨서 긁어줄는지"


"아이고야 마당에 포탄이 떨어져도 모르게 잘기 퍽도 긁어주겠다."


할머니는 파스 냄새 가득한 손으로 내 코를 쥐었다 놓으셨다.




"저씨는 왜 효자손이 그래 많아요? 파시는 거예요?"


"팔긴? 이거 사람들한테 우리 관광차 대절하라고 홍보하는 물건이지"


"그라믄 저 하나 주시믄 안 돼요?"


나는 소풍날 탄 버스 기사님 옆 자리에 꽂혀 있는 효자손을 보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관광차 대절해서 어디 갈라고? 어린 아가씨가 효자손이 왜 필요하나?"


"저희 할머니가 맨날 등이 가렵다고 긁어달라고 하시는데 밤엔 제가 자느라 못 긁어 드리거든요. 그래서 하나만 주시믄 안될까요?"


나의 갑작스런 질문과 청에 아저씨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허허하고 웃으셨다.


"효자손이 아니고 효손손이네. 자 여기 있다. 니 마음이 착해서 주는거야. 집에 가거든 아빠나 엄마한테 우리 관광차 꼭 이용하시라고 말씀드리고"


나에게 깨알같이 영업활동을 하시는 아저씨 말씀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고 나는 주저주저하다 용기를 내어 말했는데 효자손이 생긴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소풍이고 뭐고 빨리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도 아저씨한테 몇 번의 감사 인사를 더 드리고 내렸고 손에 땀이 나도록 쥐고 와 할머니한테 드렸더니 살림꾼이라며 칭찬해 주셨는데 그때부터 효자손은 꽤 오랜 시간 할머니 방 못에 걸려 할머니 곁을 지켰다.




훗날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어느 날 친정행에 딱 봐도 새것처럼 보이는 효자손 여러 개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엄마 효자손 장사해?  효자손이 이래 많대?"


"부녀회서 관광 갔었는데 관광버스 사장님이 홍보해 달라고 한 뭉텅이 주드라. 아줌마들 나눠 주고 남은 거"


"세월이 지나도 관광차 홍보 방법은 변하지를 않네. 엄마 나 이거 한 개 가져가도 되지?"


"가져가라 왜. 근데 어다 쓸라고"


"애들 말 안 들음 맴매채로 쓸라고"


"저런 저런 한다는 소리가. 대나무로 언나들 때리면 피 마른다는 얘기가 있어. 엄한 들 잡지 말고"


"에이 엄마도 참. 슬마 내가 진짜로 애들을 때리기야 하겠어"




하지만 '슬마'가 사람 잡는다고, 나는 그 효자손을 검으로 쥔 다음 무섭게 돌변했다. 처음엔 탁자나 벽을 치며 아이들을 윽박지르다가 결국은 아이들을 때렸고 얼마 후 효자손은 보기 좋게 쩍 갈라졌다. 요즘 같았으면 아동학대로 누군가가 신고를 했거나 아이들이 신고를 해서 진즉에 잡혀갔겠지만 애석하게도(?) 잡혀가진 않았지만 효자손이 망가진 그날 나는 쓰레기봉투에 버리면서 울었고 며칠 뒤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가던 날도 분리수거장 구석에서 울었다.




이후긴긴 시간 동안 우리 집에선 효자손을 볼  없었다.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사람 앞날 모른다고, 사람은 호언장담하고 살면 안 된다고 하셨었는데 우습게도 내가 다시 효자손을 찾고 있다.


언젠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민속촌에 갔을 때, 명절 직전 마트서 대나무 제품 왕창 할인행사를 했을 때 효자손을 보았는데 전래동화에나 나올법한 포악한 계모가 되어 아이들을 때리던 나의 모습이 떠올라 또 눈물이 찼고 내 생에 다시는 집에 효자손 같은 건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다짐하던 나였는데 둔해진 몸뚱이와 가려워진 등 때문에 다시 효자손을 살 궁리를 하고 있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다행히 이젠 아이들이 곰(?)처럼 커져서 내가 검을 휘두를 일은 없겠지만 나의 감정 해소를 위해 아들에게 화풀이를 하며 살았던 못난 엄마를 둔 두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 모습을 늘 안타깝게 지켜보며 살아와 준 나의 안사람(?)에게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은 오늘이다.


이제 두 주 뒤로 다가온 할머니 추도식.

나의 부끄러움과 후회는 점점 더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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