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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Dec 14. 2024

야나할머니와 나프티

나프티는 누굴까?

작년 이맘때만 떠올려도 감히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걸 상상이나 했었나? 하지만 학원이 파할 무렵 도착한 읍내 체육관서 반바지를 입은 남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고 나는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소름이 돋았다. 모든 추위는 나의 몫인가?


과연 겨울이 올까? 의심을 비웃기라도 한 듯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항상 그렇지만 작은 아이가 감기에 걸리면 그다음엔 내가 걸리고 어떤 상황에도 예외가 없는 규칙으로 정착됐다. 며칠 전부터 누런 쌍콧물을 흘리던 아이의 콧물이 맑아지기 시작할 무렵 나에게 똑같이 코감기가 찾아왔고 출근준비를 하는데 도저히 일터까지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버스 찬스를 쓰기로 했다.  


눈길 여파인지 버스 도착 시간이 정확지 않아 한참을 기다렸다. 그리고 도착한 반가운 버스에 탑승해 안쪽으로 들어가니 사람들 틈 사이로 비어 있는 한 자리가 보였고, 오십 대 후반 정도의 덩치가 있으신 아저씨가 넉넉히 앉아 계셨기에 사람들이 비워두지 않았을까? 잠시 고민하다 죽이 담긴 보온도시락까지 들고 있자니 무리다 싶어 아저씨 옆자리에 엉덩이를 구겨 넣었다.


'읍 냄새'


갑자기 코를 강타한 냄새에 머리가 아찔했지만 오랜만에 맡는 냄새가 반가웠다.  

 



"이 마한 것 좀 보래이. 똥을 이래 마이 깔리 놓고 갔네"


"할머이 누가 똥을 쌌는데?"


"좀이"


"좀이 누구여?"


"니 좀 모리나?"


"몰라"


할머니가 장롱에 켜켜이 쌓아 두었던 겨울 내복을 꺼내셨는데 하얀 면 내복에 거뭇거뭇 때가 묻어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니 밝은 눈으로 여좀 보래이. 여 내복에 좀이 똥 깔긴 거 안 비나?"


나는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봐도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할머이 뭘 보라는기여? 이거 파리똥 같은 점?"


"그래 이게 좀 똥이 자네. 약을 진즉에 놀걸. 이래 저저레를 할 때꺼정 몰랐네"


할머니는 수돗가서 빨랫대야를 가지고 오라 하시더니 내복들을 죄다 담으셨다.


"할머이 빨래 할러 갈라고?"


"오이야. 이거 그냥 입으믄 개루워서 밤 홀딱 새. 싹 빨아 입으야지"


"근데 똥은 보이는데 좀은 왜 안 보이?"


"이잉, 진즉에 달개나고 없지. 그리고 지금은 훤해서 안 비"




"할머이 할머이가 준 과자에서 이상한 맛이 나"


"저런. 봉다리를 꽁꽁 동이 놨는데도 나프티 냄시가 뱄나부다."


"나프티가 뭔데?"


"이게 나프티잖나"


할머니가 장롱 구석에서 귤을 담아 파는 망사주머니에 담긴 주먹만 한 하얀 구슬을 꺼내 보여주셨다.


"이제 약 놨으니 지들이 안 죽고 배기. 다 죽겄지"


할머니가 아주 흐뭇한 미소로 말씀하셨고 할머니 방엔 약초차 냄새와 장롱을 열 때마다 훅훅 뿜어져 나오는 나프탈렌 냄새가 묘하게 어우러져 마법사가 사는 요술세상 마법의 방 같이 느껴졌다.




날이 추워져 아저씨가 새 코트를 꺼내 입으셨나 보다. 마스크를 하고 있음에도 풍기는 나프탈렌 냄새가 어찌나 강렬한지, 누군지는 모르나 아주 꼼꼼히 코트를 보관하신 그 정성을 생각하며 웃었다.


나프탈렌 냄새를 따라 휘리릭 끌려온 어린 날의 추억들.

할머니와 내복을 빨던 단풍잎 곱던 도랑, 뽀얗게 내려 보내는 비눗물 속에서도 열심히 꼬물거리던 송사리 떼들, 어제와는 다르게 날갯짓이 무거워 보이던 고추잠자리가 자꾸만 할머니 머리에 쓴 수건 위에 앉고 등에 붙어 손이 젖은 나를 움찔움찔 애가 타게 만들던 시간, 어제보다 더 노래지고 바람이 불 때 마다 우수수 떨어진 은행잎이 도랑 위로 둥둥 내려오는 것이 성가셔 할머니 곁에서 빨래를 하는 내내 계속 꿍시렁 꿍시렁 쫑알대 나.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시간을 함께 하던 할머니와 때로는 연인처럼 소곤대기도, 때로는 친구처럼 투닥대기도 했던 장면들도 떠올라 마음이 아련해졌다.


냄새와 맛, 노래는 참 묘한 매력이 있다. 그 시절의 나로, 그날의 나로 데려다 놓는 신비한 마법 같은 힘.


버스에서 스쳐 지나간 아저씨를 통해 느낀 나프탈렌 냄새가 가져다준 추억을 회상하며, 뿜뿜 넘치는 행복한 기운에 힘입어 얼른 감기부터 나아야겠다.  그리고 세월이 암만 지나도 좀의 후손들도 정말 숨바꼭질의 달인이다.


"못 찾겠다 꾀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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