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그 시절
주부로 살면서 나를 가장 든든하게 해 주는 녀석이 있는데 그것은 닭알이다. 행여나 닭알이 떨어지는 날은 쌀이 떨어진 것보다 더 난감한 맘에 닭알을 쟁여놓고 먹는데 오늘도 닭알 배달이 왔다.
"내가 이번엔 흰 계란 샀지롱"
포장을 풀며 곁에 있던 남편에게 말했다.
"흰 계란은 뭐가 좀 달라?"
"다르지. 우선 비싸. 비싸도 느므 비싸. 산불 때매 닭들이 죽어서 그런 거라는데 비싸서 그런지 더 맛있는 거 같애. 흰 계란 진짜 이쁘다. 오늘 나 계란 플렉스한다. 장조림 할 거야"
"나야 좋지"
계란 요리를 특히나 좋아하는 남편이 웃으며 배송 온 박스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 예전에 이런 박스로 딱지 접음 완전 딱이었는데"
"당신도 딱지치기를 했어?"
"누구처럼 엄청 많이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했지"
"내가 우리 동네 딱지치기 대장인 거 어떻게 알았어?"
"뭔들 안 하셨겠어요. 어 어 코찔찔이 ㅇㅇㅇ 그림이 막 그려지는 거 같애"
동네에 딱지치기 바람이 불었다. 한 장에 30원 하는 동그란 딱지는 평상시에도 돈이 많은 덕문이만 들고 있었고, 나는 집에 있는 종이란 종이는 죄다 끌어다 딱지를 접었는데 어린 동생들 몫까지 접느라 손 끝이 얼얼해졌다. 하지만 집에 있는 종이는 전부 얇아서 아무리 겹쳐 접어도 모양새가 나지 않고, 큰 딱지 속에 작은 딱지를 숨겨도 딱지는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나는 이방 저 방 뒤지며 빠닥빠닥한 칼라로 된 종이를 찾고 다녔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들어간 광. 광엔 항아리와 고무다라 채반, 잡곡들, 엄마가 담근 오이지나 단무지, 할머니가 담가 논 술들과 청들이 숨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곳을 지독히 싫어했던 이유는 가끔 심부름을 하러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눈만 반짝이는 시커먼 쥐를 마주쳐 기함할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들아 이것 좀 봐"
내가 기세등등 싱글벙글하며 들고 나온 것은 라면박스였다.
"이걸로 딱지 접음 엄청 쎄겠지?"
"근데 언니야 안 혼날까?"
"걱정 마"
나는 가위로 조심조심 박스를 잘라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린 손끝으로 빡빡하고 튼튼한 왕딱지를 접었다.
나는 손바닥에 침을 뱉어가며 딱지치기를 했고, 온 동네 아이들 딱지를 죄다 따서 마치 장을 보고 오는 사람처럼 시커먼 봉다리를 무겁게 들고 개선장군처럼 대문간에 들어섰다.
"이 호래이가 물어가도 시원찮을! 우째 그래 저지레를 하나?"
한껏 올라간 나의 어깨가 채 내려오기도 전에 날아온 할머니의 역정소리.
"이 마한 것. 어 장에 들고 갈라고 가매이 내둔걸 그새 홀딱 빼가 딱지를 접나. 우째 그래 말을 안 듣나?"
평상시와 다른 할머니의 역정에 나는 당황했고, 두 동생들이 동시에 울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빠른 눈물 전염으로 내 눈에도 눈물이 줄줄 흘렀고, 운도 지지리도 없지 하필 딱 그 찰나 밭에 다녀오시던 엄마가 바깥 마당서부터 이 모든 상황을 들으셨다. 육상선수 출신인 엄마는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가까이에 있던, 싸리나무를 묶어 만든 기운찬 빗자루를 잽싸게 집어 무섭게 나를 좇아오셨고, 나는 잡히기 싫은 닭처럼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나는 두 시간도 넘게 집중하며 접은 딱지와 동네 애들한테 싹쓸이해 온 딱지를 눈물 콧물을 참아가며 죄다 풀었고, 수북한 종이들은 불쏘시개가 되려고 쇠죽 간 버강지 옆으로 버려졌다.
배송박스를 정리하다 떠오른 기억. 그때 싸리비로 엉덩이를 맞은 나는 격한 통증에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만졌는데 엄마가 또 때리는 순간 검지손가락이 싸리비에 부딪히면서 눈에 불이 번쩍, 금세 손가락이 퉁퉁 부어올랐었다. 그 아픈 손가락으로 딱지를 푸느라 얼마나 힘들었던지. 나도 참 말썽꾸러기였다.
매주 분리수거를 할 때마다 택배박스를 내놓느라 귀찮은데 이 흔한 박스가 그 시절엔 너무 귀했다. 할머니가 아끼던 보루바꾸. 그런데 재밌는 건 지금도 시골집에 가면 엄마도 할머니처럼 박스를 차곡차곡 모아 두신다. 내가 전부 버려버린다 하면 사 남매네 택배 보낼라치면 박스도 귀하다 하시며 가만히 냅두라 하신다.
딱지치기 대왕이었던 그때가 나의 진정한 전성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매타작의 시대였다. 엄마가 지금도 때리고 키워서 미안타 하시는데
나의 대답은 늘 같다.
"맞을 짓 했으니 맞아야지"
덧붙이는 말 : 대문 사진은 큰 아이 어렸을 때 접어줬던 표창이 생각나 접어봤는데 아~ 손끝이 느므 아팠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