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와 봄똥 씨래기

입맛도 유전?

by 별바라기

"이모야 나 지금 봄동 시래기 만들고 있다"


"우와 진짜?"


"담에 집에 갈 때 삶아서 얼려갈게"


"오케바리"


한 손으론 주섬주섬 작은 봄동잎을 소쿠리에 널며 끊은 동생과의 전화. 그 뒤로 나는 동생에게 봄동 시래기의 건조 안부를 종종 전했다.


하루 이틀 가을볕을 쬐던 봄동잎은 아주 작은 크기로 쪼그라들었고, 따뜻한 물에 조심스레 불려 푹 삶자 다시 포동포동한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할머이 뭐 해?"


"뭐 하긴 봄똥 씨래기 맹글지"


"엥? 이거 토기밥 아니야?"


"이잉 뭔 토깨이밥은? 내 겨울에 물라하지"


"근데 맛이 없어 보여"


"맛이 읍긴. 겨울엔 이기 고뿔약이여"


할머닌 손바닥만 한 파랗지도 노랗지도 않은 배춧잎을 싸리로 만든 발 위에 한 장 한 장 펼쳐 놓으셨다.




공회당 마당서 놀고 있는데 연기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아직 쇠죽불을 때려면 한참 시간이 남았는데 동네를 감싸는 연기 냄새에 두리번거리며 살피니 하얀 연기가 올라오는 위치가 분명히 우리 집이었다.


"야들아 내 집에 간다"


"야 간나야 이거 붙잡아 준대매? 그리고 다시 날리보고 가야지"


덕문이가 찢어진 방패연에 밥알을 뭉개 문종이 조각을 붙이다말고 구시렁 댔다.


"어차피 지금 밥알이 무거워 자꾸 개밥 먹을 테니 밤 새 빠짝 말리가꼬 낼 다시 하자. 낼은 내가 잘 붙들어 줄게. 나 간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뛰어가는 내 등뒤로 덕문이가 소리쳤다.


"간나야 가다 콱 자빠져라"


"문디 새끼. 낼 보자"


나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뛰었는데 손바닥을 펴고 뛸 때 보다 더 느려지는 것 같은 기분에 다시 주먹을 펴고 잽싸게 뛰었다.




단숨에 달려와 마당에 들어서자 익숙한 연기 냄새가 났고,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신 할머니가


"용하기도 용하기도. 우째 이래 딱 알고 심부름을 하러 왔대?"


"할머이 오늘 뭐 해 먹어?"


"뭐 해 묵긴 씨래기 쌂아 묵지"


할머니의 목소리와 말투는 신이 나 있었지만 시래기라는 단어는 나를 실망시켰다.


"그니까 그 씨래기로 뭐 해 먹냐고?"


"뭐 해 묵긴. 국도 끼리 묵고 딘장에 무치 묵지"


이런 김 빠지는 소리를 들으려 덕문이의 저주를 듣고 온 건 아니었는데, 나는 갑자기 아까 곤두박질치던 방패연처럼 기운이 빠져 슬그머니 할머니 방으로 기어들어갔다.


"기측도 매측도 읍다했두만 이 잠 꾸래기가 또 자네. 지녁도 안 묵고 자믄 우째? 얼른 인나 저녁 무래이"


연기 냄새가 잔뜩 묻어 있는 할머니의 차고 거친 작은 손이 목덜미를 만지는 바람에 화들짝 잠이 깼다.


"씨도둑질은 못 한다고 우째 이래 잠이 많은지. 어여 인나 밥 무"


창호지 문 틈으로 안채의 밝은 형광등 빛이 보이는 걸로 봐선 이미 해가 진 것 같았다.


"나 밥 안 무"


"저런 저런 또 안 문다 카네. 오늘 지녁이 뭔 줄 알고 안 문대? 나가봐 오늘은 소괴기국이여"


고기란 말에 반쯤 떠 있던 눈과 귀가 번쩍 띄었다. 그리고 진짜로 할머니 말은 거짓부렁이 아닌 참말이었다. 시래기 속에 살짝살짝 숨어 있는 작은 소고기 살점들이 어찌나 심장을 간질간질하게 하는지. 나는 국그릇 속에 숨은 보물 찾기를 하느라 계속해서 숟가락을 휘적거렸었다.




"이모야 이 봄동 시래기로 뭐 해 먹을 거야?"


"육개장도 끓이고 된장에도 무쳐먹어. 언니도 한 번 해서 먹어봐 진짜 맛있어"


"이모 니도 예전에 할머이 해 먹던 그대로 해 먹네"


"그니까 언니야 웃긴 게 예전엔 맛없었던 거 같은데 자꾸 옛날에 먹던 게 먹고 싶고 먹으면 맛있고 그래"


"그거 나이 든다는 증거래"


"괜찮네 그럼. 나이 들수록 맛있는 게 많아질 테니"


"오 똑똑한데"


나이 들수록 입맛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입맛 돋우는 음식이 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아직 입맛이 없었던 적은 없어서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나쁜 일은 아닐 테니, 나이 드는 것도 그리 억울하지만은 않은 것도 같다. 오늘도 할머니와의 추억에 행복해진 겨울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