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서운함은 지금의 웃음으로
주방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촤르르 소낙비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근래엔 들은 적 없던 작은 아이의 박장대소에 얼른 손을 씻고 거실로 나갔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뭐가 그렇게 웃겨? 으헉"
"으하하하 으하하하"
아이의 웃음은 그칠 줄 모르고, 이 소란에 방에 있다 나온 큰 아이는 방바닥 한 번 아빠 한 번 번갈아 보고, 금세 웃음 감염된 나까지 웃기 시작했다.
"아니 이거 왜 이래?"
"나는 억울해. 누가 뚜껑을 꽉 안 닫은 거야?"
남편의 목소리엔 정말 억울함이 가득했고, 더 웃으면 안 될 거 같아 나는 웃음을 멈췄다.
"이거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 주우면 되지"
내가 쪼그리고 앉아 주운 콩을 후후 불어 입에 넣자
"아 엄마 줍긴 뭘 주워요. 그리고 그걸 왜 드세요?"
큰 아이가 질색하며 제지했다.
"그렇다고 버려?아깝게. 살살 주우면 돼"
"그래 오빠. 이거 아빠랑 나랑 탈모 예방으로 먹는 콩이야"
"바닥에 고양이 털이랑 먼지는 어쩌려고?"
"오빠 먹어도 안 죽어. 그럼 오빠는 먹지 마"
바닥에 떨어진 작은 콩을 주워 입에 또 넣던 나는 아들의 살벌한 눈빛에 줍다 말고 손바닥으로 쓱쓱 쓸어 모아 휴지통에 넣었다.
작은 아이가 말한 사건의 과정은 이랬다.
엄마가 2개로 나눠 담은 콩을 식탁에 두고 설거지를 하러 간 사이 본인이 거실과 베란다를 오가며 콩을 먹고 있었는데 방에서 나온 아빠가 식탁을 정리한다고 통을 들면서 순식간에 와르르 쏟아졌다는 것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집에서 이런 자잘한 사건이 생겨 나는 계속 웃음이 났지만, 평소 이런 잔손 가는 일을 딱 싫어하는 남편은 한참을 뚱해 있었다.
겨울이 되면 할머니 방엔 늘 구수한 강네이 박상이 있었다. 바람 들어간다고 단디 싸매논 봉다리였지만 구수한 냄새는 기가 막히게 빠져나와 내 개코를 간질였고, 나는 그걸 먹고 싶어 늘 허기가졌다.
한 날은 할머이 방에 들어갔는데 평상시와 다른 구수한 냄새에
"어 이거 무슨 냄새지?"
코를 킁킁거리며 할머이 곳간 장롱문을 열자 그 안엔 하얗다 못해 빛나는 쌀튀밥이 있었다.
"거봐 이럴 줄 알았어. 방 냄새가 다르잖아. 우리 이거 한 움큼만 꺼내 물까?"
"언니야 그거 고모 온다고 할머이가 튀 왔댔어"
"괜찮아 많은데 뭐. 티 안 나게 꺼내 무믄 되지"
나는 장롱 맨 위에 올려져 있는 쌀튀밥 한 줌을 꺼내려 까치발까지 하고 봉다리를 열었는데 그 순간 할머니 방엔 쌀튀밥 폭포가 생겼다.
순식간에 일어난 참사.
동생은 울기 시작했고, 자동으로 눈물 전염된 내 눈에도 눈물이 떨어졌지만 울 새가 없었다. 일종이네로 마실 가신 할머이가 쇠죽불을 때러 오시기 전에 얼른 수습해야 한다는. 나는 방바닥에 소복이 쌓인 폭포를 가만가만 주워 담았지만 생각보다 더딘 고난도의 작업에 일은 진전되지 않았다.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쌀튀밥을 줍던 나는 어느샌가 후후 불어 입에 넣기 시작했고, 봉다리는 부풀어지지 못했다.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주운 콩을 후후 불어 입에 넣다가 어린 시절 똑같은 자세로 쌀 튀밥을 주워 먹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그날 할머이한테 호래이가 물어가도 시원찮을로 시작한 온갖 쿠사리를 다 먹고 보너스로 엄마에게 매타작도 당했었다. 그 빛나던 쌀튀밥 봉다리는 막내 고모가 통째로 집어 갔는데 그날 나는 우리와 달리 특별 대접받는 고종사촌 동생들이 미웠다. 할머이한테는 사촌들만 진짜 손주였고, 우리는 가짜 손주 같아 서운함이 한동안 가시질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에 다녀온 엄마 손에도 영롱한 쌀튀밥이 들려있었다. 식구들 먹을 쌀을 아껴 튀겨 오셨는데, 우리는 긴 아나콘다처럼 구불구불한 모양을 보여주는 연탄보일러 방바닥에 배를 깔고 쌀튀밥을 한 알 한 알 집어 먹다가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사람은 한 움큼씩 먹는 게임도 하면서 행복한 겨울날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날 서운했던 건 나 혼자만은 아니었었던 것도 같다. 그 뒤로 겨울마다 엄마는 꼭 쌀튀밥도 조금씩 튀겨다 주셨는데 희한 케도 점점 자랄수록 밍밍한 쌀튀밥은 생각보다 맛이 없어졌고 주워 먹기도 귀찮아졌다.
콩을 주워 먹다 떠오른 기억.
딱 설을 앞둔 이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시간은 흘러 흘러 또 맛있는 설이 다가오고 있고, 며칠 전 내린 폭설에 할머니 산소를 덮은 눈은 다 녹았으려나?
그리고 이번 콩 사건에 젤 웃긴 건 웃는 줄만 알았던 작은 아이가 굉장한 스피드로 기가 막힌 현장사진을 남겼는데 사진 속 남편의 표정은 볼 때마다 나를 웃게 한다.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