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재주 덕분에 생긴
"학교 다녀왔습니다."
"오이야 잘 댕기 왔나? 니 여 와서 이것 좀 보래이"
할머니가 기분이 좋을 때 내시는 손등으로 콧물 훔치는 소리에 잔뜩 기대를 하고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이 뭘 보라고? 암것도 없는데?"
"암것도 없긴. 잘 둘리보래이"
"어 할머이 사진 찍었네?"
방바닥엔 옥색 한복을 입은 할머니 증명사진이 있었는데 액자 속의 사진은 엄청 컸다.
"할머이 근데 이 큰 사진은 왜 찍었어?"
"이래 찍어두믄 오래 산다 동네에 장사꾼이 드와 꼬시서 할마이들하고 다 같이 찍었지 뭐"
그 사진을 다시 마주한 것은 몇십 년이 지난 할머니의 장례식에서였다. 할머니가 사진을 찍으셨던 그 시절엔 그것이 영정 사진인 줄 몰랐고 장롱 안에 고이 모셔져 있던 사진이었기에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었다. 사진을 미리 준비해 두면 장수한다고 온 동네 할머니들을 꼬셨던 사진기사의 말처럼 사진을 찍었던 시절부터 꽤 긴 시간이 지났으니 장수하신 거라 생각해도 맞는 걸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미리 준비하는 영정 사진에 부정적인 감정이 있다. 그건 시부 때문인데 어느 날 시댁에 들른 날 평생 아버님이 받으신 상장과 감사장들이 올려져 있는 진열장서 아버님의 영정사진을 발견했다.
"어머니 아버님은 이 사진을 왜 찍으신 거예요?"
"응 그거? 아버지가 증명사진을 찍을 일이 있어 찍으셨는데 퍽 맘에 든다고 확대해서 갖다 놓으셨어. 하루라도 젊었을 때 기록을 남겨두고 싶으시대"
"엥? 저는 그렇게 잘 나온 사진 같지 않은데, 아버님 실물보다 무섭게 나왔어요"
"그 고집을 누가 말려. 사진 찍을 때 웃으면 누가 잡아가는 줄 아는 분이니. 저 거봐 가족사진에도 혼자만 안 웃었잖아. 사진기사가 그렇게 웃으라 부탁했는데도. 그런데 옛날부터 영정사진 미리 준비해 두면 장수한다는 말이 있어서 할아버지 할머니도 찍어 놓으셨었는데 당신도 그러고 싶으셨나봐"
우연인지 시아버지의 예지력인지 지금도 궁금하지만 잘 나왔다 당신만 흐뭇해하시던 증명사진은 몇 년 뒤 진짜 영정사진이 되었다. 지금도 그 사진은 처음 놓였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나는 시댁 서재방에 갈 때마다 보게 되는 그 사진이 여전히 맘에 들지 않는다. 그 사진은 아버님의 따스함과 자상함을 일도 담아내질 못했다.
"언니 잘 지내시죠? 저희 다음 달 언니네 단지로 이사 가요"
오랜만에 근황을 전해온 이웃 엄마. 우리가 처음 옆집 사람으로 만났던 시절 갓 돌 지난 아이가 벌써 스무 살이 되었고, 미대 준비 중이며 알바도 하고 있는데 그중엔 당근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도 있다고 했다.
"그려? 그럼 나 우리 할매 초상화 하나 부탁해도 될까?"
귀한 재주를 가진 소녀의 열정으로 탄생한 할머니의 신식 초상화가 이것이다. 언뜻 보면 할머니인지 한복 입은 나인지 웃음이 나지만 퍽 맘에 든다. 그래서 또 아버님의 초상화를 의뢰해볼까 한다.
봄비치곤 꽤 많은 비가 내렸다. 바싹 건조하던 할머니 산소에 언제나처럼 제비꽃도 할미꽃 순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겠지? 다음에 친정에 들르면 국화꽃 대신 신식 초상화를 보여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