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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영 May 26. 2022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기엔 나는 아직 한참 부족하니까

은쟁반 위에 조심히 올려진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어른들을 위해

나는 항상 따뜻하고 애교스럽기보다는 차갑고 무던한 딸이었다. 감정표현에 서툰 대신, 나는 똑똑하고 철이 빨리 들었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부모님의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 곧 나의 애정표현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인지하지 못한 어느 시점부터, 이 믿음은 나와 함께하고 있다.


이 사고방식의 맹점은 내가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니게 될 때 생긴다. 적어도 내가 나 자신이 자랑스럽지 못한 상태라고 느낄 때 문제는 일어난다. 내가 더 이상 나의 성취와 결과물들로 내가 받는 사랑을 되돌려주지 못하는 날, 나는 어떤 존재가 되는 걸까. 내가 실패하면, 나는 나를 가장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 걸까.


더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성적표나 상장들을 안겨주는 것으로 당신의 딸이 이렇게 잘 크고 있다고, 당신이 이렇게 딸을 잘 키우고 있다고, 증명해 보여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당신의 손재주와 미적 감각, 그리고 당신의 끈기와 부지런함이 나에게 와서 다른 사람들도 알아주는 결과를 보란 듯이 내고 있다고, 그래서 나는 매일 당신의 딸인 게 자랑스럽다고, 알려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세상이 들이대는 모든 기준에서 봤을 때, 당신의 희생이 만들어낸 이 결과물이 성공적이라고, 그래서 당신이 들여온 수년간의 희생이 결코 부질없지 않았다는 걸 몸소 보여주고 싶은데. 당신의 인도와 지지로 내가 맞는 길을 잘 가고 있다고, 당신을 닮은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은데.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자랑할 것이 남아있지 않다고, 만점이 찍힌 시험지도 이젠 없고, 칭찬이 빼곡한 성적표도 없으며, 하물며 는 당신에게 신난 목소리로 들려줄 재밌는 일화도 없다고. 철없는 이야기와 농담들로 당신을 웃겨주기에는 너무 커버렸고, 내 눈부신 성공과 새로 얻은 지혜로 당신을 감동시키기에는 나는 아직 보잘것없는 실수투성이 초보 어른이라고. 인간이 완벽할 수 없고, 또 완벽을 추구해서도 안 되는 것도 알지만 나는 이제 나를 더 깎아내고, 더 완벽해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 말고는 도무지 당신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지 모르겠다고. 내 삶을 당신에게만 맞추지 말라 하지만 아직도 나는 내가 글쓰기로 먹고살겠다는 꿈 대신 더 실용적인 전공을 택한다고 결정했을 때 당신의 얼굴을 스쳤던 안도와 기쁨을 잊지 못한다고. 사람들이 내 결점을 지적할까 봐 걱정되고, 또 내 단점들을 당신의 탓으로 돌릴까 봐 매일 두렵다고. 내 실패가 당신의 희생의 가치를 떨어트릴까 봐 너무나도 무섭다고. 갑자기 사랑과 존경을 말로 표현하기엔 나는 너무 무뚝뚝한 딸이었고, 내 근심과 걱정들을 쏟아내어 당신의 관심을 갈구하기엔 나는 너무 빨리 철이 나버렸다고.


어른들은 이런 고민을 다 참고 사냐고. 아무도 왜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다고, 낯선 환경에서 모르는데 아는 척, 상처받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잘 견뎠다고 칭찬해주지 않느냐고. 남들에 비해 내 성취는 왜 한참 작고 의미 없어 보이고, 내가 가는 길은 왜 이렇게 길고 막막해 보이냐고.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는데, 나만 왜 고민뿐이냐고, 갑자기 눈물은 왜 이렇게 많아진 거냐고. 어른이 되는 건 원래 이렇게 아프고 외로운 거냐고, 인간관계는 원래 이렇게 공허하고 계산적인 거냐고. 사랑은 본래 어렵고, 마음의 상처는 정말 시간이 해결해주느냐고, 다 물어보고 싶은데


당신의 첫사랑도 이렇게 힘들었냐고. 당신도 첫 자취방에서 이렇게 외로움을 느꼈냐고. 당신도 낯선 타지에 남겨졌을 때, 처음 느껴보는 공포와 허망함에 조용히 눈물을 삼켰냐고. 당신도 처음 혼자 아팠던 날 사무치게 서러웠냐고. 당신도 당신의 부모에게 이런 커다란 미안함을 느꼈냐고. 당신도 나와 비슷한 나이였을 때 이런 고민들로 며칠밤을 지새웠냐고. 내가 느끼는 건 그저 다 지나갈 성장통이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전화 너머 당신의 목소리만 들으면 하고 싶던 말들은 다 어디로 가는지. 혹시나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이 걱정하진 않을까, 혹여나 내 문제가 당신의 삶에 방해되진 않을까. 나보다 눈물도, 생각도 많은 당신이 나 때문에 밤잠을 설치진 않을까, 내가 닦아줄 수 없는 눈물을 흘리진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담아두고 나만 아프면 되지, 하는 마음이 또 든다. 그래서 늘 밥은 먹었냐, 지금 뭐하냐, 누구누구는 잘 있냐 등의 의미 없는 질문으로 통화의 적막을 채운다. 그마저도 못하는 날들도 있다. 잘 지내냐는 간단한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게 왜 이리 어려운지. 잘 지내는 데,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어떤 날은 입이 차마 안 떨어진다.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목소리에 참지 못하고 내 진심을 쏟아낼까 봐, 사실 잘 지내지 못하다고, 집이 그립고 무엇보다 당신이 너무 보고 싶다고 엉엉 울며 고백할까 봐. 내 환경은 나보다 한참 과분한 것 같고, 주변 사람들은 다 멀쩡한데 나만 뒤떨어지는 것 같고, 좋은 딸, 좋은 손녀, 좋은 친구, 좋은 어른 그 무엇도 못 되는 것 같다고 당신 앞에서 인정해 버릴까 봐. 다 그만두고 싶다고, 더 이상 못하겠다고 내 낯선 나약한 모습을 보일까 봐. 나도 내 감정이 주체가 안 되는 이런 날들에는 그 쉬운 전화 한 통, 문자 한 번을 하기가 너무 두렵다.


오늘도 그런 힘든 날 중 하나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이모티콘과 카톡을 보내기엔 내 마음이 너무 무겁고, 영상통화를 하기에는 하루 종일 눈이 퉁퉁 부어있던 날이었다. 나는 이제 이렇게 글을 늘여놓는 것 말고는 마음을 전할 방법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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