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쿠 가정용 제빙기, 15만 원
10만 원 이상 제품은 합의하에 구매하기
매년 여름마다 얼음정수기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둘 중 누구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내가 쿠쿠 가정용 얼음제빙기를 구매하였다.
물론 윤서방은 모르게.
왜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가끔씩 충동적으로 물건을 구매하고 싶을 때가 있고(대부분은 호르몬의 영향이다) 왠지 설득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고 못 사게 할 것 같아서라고 할까. 나는 그런 편이었다. 못하게 할 것 같으면 이야기하지 않고 질러버리는 나쁜 버릇이 있는 것이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한 동짜리 아파트 입구 어귀에서 구멍가게를 했었다. 엄마는 없는 형편에도 미술학원이다, 피아노학원이다, 첫째 딸이 기죽지 않게 남들처럼 학원에 보내줬다. 통통했던 딸의 외모를 걱정했는지 엄마는 과자나 새콤달콤을 먹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나는 학원에 갈 때마다 하나씩 슬그머니 훔쳐서 먹었다고 한다.
중학교 때는 부모님 모르게 귀를 뚫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피어싱을 하고 다녀서 한동안은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귓불만 뚫었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귓바퀴에도 하나둘씩 구멍을 늘렸다.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한 번씩 치를 때마다 구멍 개수를 늘렸던 것 같다. 수능 전에는 귓불의 구멍을 3미리, 5미리까지 늘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자학에 가깝게 귀를 괴롭혔던 것 같다.
취업하고 3년 차에는 부모님 모르게 문신을 했다. 근데 서른이 넘었으니까 이건 허락을 받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다. 그래도 만약 부모님께 먼저 의견을 물었다면 당연히 반대했을 것이다.
이 버릇이 결혼하고도 이어져서 결혼 1년 차에 윤서방의 동의 없이 동생의 전세금 지원을 위하여 내 명의 마통에서 천만 원을 빌려주었다. 신랑이 노발대발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내 명의 대출이고 동생은 갚을 텐데. 말했으면 동의를 하기는 했을까? 네 뜻대로 살 거면 혼자 살라는 말로 시작해서 있는 악, 없는 악을 다 내지르고도 윤서방은 씩씩거렸다. 앞으로는 동의 없이 가족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도 몇 년 동안 지겹게 그 일을 입에 올렸다. 아직도 몰래 사는 일은 있다. 주로 고양이 용품이 그렇다. 신랑이 생각한 것보다 비싼 제품들이지만 동의 없이 사모으고 있다. 한 번 욕먹고 말자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욕을 또 먹었다. 쿠쿠 가정용 제빙기. 아침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찾아대는데 얼음 얼리기가 너무 귀찮아서 제빙기를 동의 없이 구매했던 것인데, 본인이 먹을 얼음인데 왜 화를 내는 것인지? 사전 동의 없이 구매한 후 통보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다. 맥시멀리스트라 물건을 자꾸 사모아서 집이 어지러운 것도 싫다고 한다. 화를 내고 씩씩거리며 부엌의 물건을 정리하는 것을 보면서, 그나마 15만 원짜리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 비싼 제품이었으면 얼마나 난리가 났을까. 네 X대로 할 거면 혼자 살라는 욕을 오래간만에 다시 들었다. 5년 동안 욕을 하도 먹어서 이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쿠쿠 가정용 제빙기는 다른 단점은 제쳐두고, 소음이 심하다. 방문을 닫아두면 괜찮을 것 같은데 고양이 때문에 잘 때 방문을 닫을 수 없다 보니 잘 때 소리가 너무 신경 쓰인다. 그렇다고 꺼두면 굵은 얼음을 만들 때까지 다시 전력과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결국 윤서방 말이 맞았다. 실패한 소비 1 추가랄까.
내 멋대로 살다가 결혼해서 둘이 함께하는 생활을 하자니 많은 것에 부딪히고 가끔은 갑갑하기도 하다. 그래도 혼자는 싫으니 맞춰서 살아가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