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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을 가질래? 눈을 뜰래?

by 산들바람

지금부터 여러분이 시각장애인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안타깝게도 무일푼이다.

그러나 요행스럽게도 어디선가 10억이라는 돈이 생겼다.

여전히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하지만 큰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돈이라 생각하며 살고자 했는데 어디선가 뜻밖의 제의가 들어온다.

의술이 발달되어 수술만 하면 눈을 뜰 수 있다는데 그 비용이 딱 10억이 든단다. 전재산을 모두 쏟아부어야만 하는 상황이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시각장애인인 나의 남편을 비롯해 주위 지인 시각장애인들에게 물어보면 단연코 눈을 뜨는 수술을 하겠다는 선택을 한다.

0.1초의 겨를도 없이 하나같이 같은 목소리를 낸다.

중도실명인이라고 해서 이전에 본 기억만을 되살리며 안 보고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전에 보던 풍경은 세월을 달리하며 얼마나 변했는지, 나의 부모는 얼마나 주름이 늘었는지, 내 아이는 이전과 다르게 어떤 모습으로 얼마만큼 자라 있는지 궁금한 게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어차피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는 선천성 시각장애라 해서 차라리 10억을 가지고 안정되게 살면 되지 눈을 뜨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두침침하게 보이던 20도 미만 각도로 보이는 저시력이던 모두 다 온전하게 눈 뜨고 사는 게 일생일대의 가장 큰 소원이다.

꿈에서라도 경험해 보고 싶은 가장 간절한 소망이다.


얼마 전 남편의 지인은 절대 밤에는 케인을 들고 다니지 않고 복지콜이나 나비콜을 이용한다고 했다.

여자 시각장애인인 지인이 어느 날밤 케인을 들고 길을 걷다 웬 남자가 길을 알려주겠다며 어디론가 끌고 가더란다. 너무도 놀라 소리를 지르며 주위 이목을 집중시키자 다행히도 도망을 치더란다. 그전에도 서울역 근처에서 노숙자가 막무가내로 자신을 끌고 가려고 해 소리를 내지른 적이 있다고 했다.

어떤 여자분도 그러한 까닭에 시각장애인처럼 보이지 않으려 지팡이도 없이 걷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이리저리 비틀댄다. 그러자 술 취한 남자가 다가와 나와 함께 어디 가서 술 한 잔 더 하자며 팔을 잡아끌더란다.

남자보다 상대적으로 물리적인 힘이 약한 여성이 치한의 대상이 되는 일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시각장애인 여자라 그런 일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어떤 지인은 자신이 키우는 반려견을 데리고 놀러를 오게 되었는데 마침 우리 집 어린 막내딸아이가 나이 든 노견을 데리고 숨바꼭질을 해 주었더니 그 놀이가 어찌나 재밌었는지 잠시 쉬고 있는 중에도 멍멍 짖어대며 빨리 숨으라 야단이다. 지인은 여태 자신을 따라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만 보다 죽을 날이 가까운 자신의 반려견이 저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처음이라며 무척이나 마음 아파했다.

이후 강아지는 자신의 주인을 빤히 올려다보거나 무언가를 원하는 눈빛이지만 주인은 알아채지 못한다.

반려동물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린아이를 밟거나 깔고 앉는 일이 있다면 그 괴로운 심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혹자는 장애가 있더라도 마음먹기 달려있다 하겠고, 단지 불편한 것일 뿐이라며 위로할지 모르지만 나와 관계를 맺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장애로 인해 피해를 받거나 불편함을 겪을 때,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할 때는 단지 불편한 정도이구나...라는 감정의 범주를 벗어난다.

특히나 네 아이를 부양하는 가장의 위치에 서 있는 남편은 말은 하지 않지만 더욱 그러할 것이다.


몇 년 전부터 항간에는 시각장애인도 볼 수 있게 된다는 희망찬 기사들이 올라오며 이들을 무척이나 설레게 했지만 아직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상용화되는 것은 요원한 일인지 이제 어떤 기사가 나오더라도 상처받고 싶지 않은 시각장애인들은 대체로 심드렁한 반응이다.

일론 머스크가 뇌신경과학 기업인 뉴럴링크를 통해 FDA에 승인을 받아 뇌에 직접 컴퓨터 칩을 이식하는 방식으로 올해 이미 3번째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완료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식 방법은 로봇이 약 2.4센티쯤 되는 납작한 칩을(64개에 달하는 미세 전극이 내장되어 있음) 뇌에 이식한다. 이때 로봇은 1mm 길이의 바늘 전극이 뇌신경에 자극을 주지 않으면서 초정밀 이식을 가능케 한다고 했다.

그중 세 번째 사례인 루게릭병 환자는 BCI(두개골을 뚫는 방식이 아닌 머리에 붙이는 방식)를 이용하여 텔레파시, 즉 자신의 생각을 통해 1024개의 전극에서 수집한 신호를 블루투스로 컴퓨터에 전송해 영상 제작을 가능케 하거나 뉴럴링크에서 개발한 대화 앱이 발병 전 목소리가 담긴 영상에서 목소리를 따와 인공지능으로 목소리를 복구하였고 이를 텍스트로 입력하면 다시 목소리로 변환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하고, 뇌졸중으로 쓰러져 20년간 사지가 마비되었던 여성도 머리에 붙인 센서가 환자의 신경신호를 0.08초마다 포착해 문장을 읽거나 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도 밝히고 있다.

이밖에도 BCI를 활용해 하반신 마비 환자가 걸을 수 있도록, 시각장애인이 시력을 찾을 수 있도록 연구 중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또한 중국에서도 미국을 맹추격하며 지난 3월, 중국뇌연구소(CIBR)와 국유기업인 뉴사이버 뉴로테크가 무선 두뇌칩을 3명에게 이식했으며 앞으로 10명에게 추가 수술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이런 기사가 심심찮게 나오는 것을 보면 머지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있을 모양인가 싶지만 남편이 더 나이 들기 전 아직은 기동력이 있을 때, 그리 큰 금액을 들이지 않고도 이러한 현실을 맞닥뜨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난 가끔 상상해 본다.

만약 내 남편이 눈을 뜰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으로 달라질까?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명사적으로만 외워왔던 색깔마저도 눈을 떠 이것이 파란색이라 알려주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어떨까....

시퍼런 색, 시퍼러죽죽한 색, 빛바랜 푸른색, 불그레한 색, 선홍빛 색 등 수없이 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제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면 얼마나 신기할까?

설명으로만 듣던 거대한 산과 장엄한 폭포, 고개를 들어 올리면 무시로 보이는 하늘과 사소한 들꽃조차도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에 정신을 빼놓고 애들처럼 밤새는 줄 모르고 게임만 하지는 않을까?

텔레비전 속 아름다운 연예인에게 시선을 빼앗겨 나는 쳐다도 안 보는 건 아닐까?

두 살 터울인 아들 두 명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면 누가 큰아들인지 작은 아들인지 알아챌까?

아버님의 모습과 거울에 비친 자신을 비교하며 닮았다고 생각할까?

나의 아가씨적 사진을 보고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지는 않을까?

그의 글씨체는 어떨까?

처음부터 한글과 영어 알파벳, 간단한 한자 정도는 다시 배워야겠지?

사람은, 나무는, 강아지는, 이렇게 생겼구나를 직접 보고 느끼게 된다면 정말 어떤 느낌일까?

아니 처음부터 볼 수 있었다면 내 남편은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니 연구가나 교사가 되었을까? 씩씩하고 용맹하니 군인이 되었을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니 판검사나 경찰이 되었을까?

그가 만약 볼 수 있었다면 그는 어떤 운명의 길을 걸었을까?

나를 만날 수는 있었을까?

중년의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뜨게 된다면 남편은 가장 먼저 무슨 일부터 하고 싶을까? 무엇을 가장 보고 싶을까?

또 남편의 지인들은 시각장애인이 아니었다면 하나같이 정해진 듯 안마사가 되어 살지는 않았을 테니 각자 그들의 성격과 개성에 따라 어떤 직업을 갖고 살았을까? 우리는 지금처럼 인연을 맺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끝도 없고, 수도 없는 질문을 만들어내며 흥미진진하게 또는 가슴 저리도록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게 된다.


예전 우리가 막 연애를 시작할 무렵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며 내 얼굴을 일일이 손으로 더듬으며 비처럼 눈물을 쏟아내었던 내 남편...

지금도 내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또는 어떤 신발을 신었는지 궁금해서 신발까지도 손으로 만져보는 내 남편...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건 어쩌면 행운이고, 행복이고, 감사함이라는 것을 나는 남편을 만나며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시각은 가장 빠르고 직관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일차원적, 또는 그 이상의 호기심을 해결할 수 있으며 또 때로는 인간의 감정을 통해 즉각적인 행동으로 나타내는데 가장 많은 역할을 하는 기관이니 어쩔 수 없는 거다.

남편을 만나고부터는 평소엔 무심히 지나치던 사물과 풍경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도, 우리의 아이들도, 화려한 야경 속 빌딩숲도, 도로 위를 지나며 보이는 탁 트인 한강도.......

눈만 뜨고 있다면 애써 보려 하지 않아도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을 그와 함께 볼 수 있다면 그는 어떤 말을 했을까? 그와 나는 어떤 감정을 공유했을까?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온다면...... 그날이 머지않아 오게 된다면......

나는 생각만으로도 벅차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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