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네? 그래요? 어디로 가셨지?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왜? 외삼촌이 뭐라셔? 아버님이 어디로 사라지셨대?"
"응... 저녁예배 드리고 가신다고 하셔서 외삼촌이 잠시 옷 갈아입고 돌아온 사이 없어지셨대..."
남편의 아버지, 시아버님이 치매에 걸리셨다.
주 중에는 주간보호센터를 다니시고 주일이면 교회로 가신다.
아버님과 우리는 교회가 달라 조금 걱정이긴 해도 다행히 근처 사시는 외삼촌 내외분이 계셔서 아버님을 지켜봐 달라 부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날은 함께 집에 가서 저녁 식사라도 하고 오자고 해도 난 여기 있겠다 하시더니 외삼촌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추적기로 추적해 보니 인천 계산동이다.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지구대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와서 아버님을 모셔가라는 연락이 왔다.
다행히 그날 아버님을 무사히 모셔올 수 있었지만 요즘은 계속 어딜 나가시려는 통에 대학생인 큰아들과 내가 추적하고 찾으러 나가는 일이 다반사다.
"아버지는 찾었어?"
"네, 인천에 가 계시더라고요... 경찰서에 가서 모셔 왔어요"
"아이고... 인천이 어디라고 거길 갔어 그래? 요즘에 자주 길 잃어버렸담서? 늬덜이 고생이 많다"
"저희 집사람이 고생이죠... 저야 어릴 때 맹학교든 어디든 데리고 다니던 아버지 생각하면 이건 아무 고생도 아니예요...."
남편은 곧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니.. 애가 눈을 못 마주치지 않어요? 얼른 병원에 데리고 가 봐야 될 것 같은데?"
이웃들의 말대로 남편은 백일이 다 되도록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안 그래도 이상하다 싶던 부모님은 아이를 둘러업고 병원에 가 본다.
"저..... 이런 말씀드리기는 죄송하지만.... 앞으로 이 아이는 앞을 못 보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 뭐라고요? 평생 앞을 못 보고 산다고요? 우리 애가 장님이라고요? 이유가 뭐래요? 이유가 있을 것 아녀요!!!"
"소아 백내장입니다. 지금 국내에서는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혹시 미국이나 소련에 가서 수술을 받으면 일반인처럼 잘 볼 수는 없어도 희미하게 보일만큼은 됩니다."
"당장 먹고 죽을 돈도 없는디 소련이니 미국이니 그런델 어찌 간대유? 진짜 다른 방법은 없대유 선생님?
".................."
이후 부모님은 아이를 데리고 좋다는 병원, 한의원, 기도원은 다 가 봤더랬다.
하지만 아이가 눈을 떠 볼 수 있다는 희망의 소식은 어디서도 듣지 못했다.
'이 아이를 이제 어떻게 가르치고 길러야 하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는 자라면서 무척이나 영특했다.
겨우 세 살 무렵이지만 교회 피아노 의자에 기어 올라가 아무도 가르쳐 준 적 없는 찬송가를 쳐 본다.
몇 자리 숫자의 암산을 척척 해 대며 겨우 일곱 살 된 아이는 혼자서 기타 조율을 할 수 있을 만큼 예민한 청력을 가졌다.
하지만 가난한 세간살이에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손바닥 하고도 반쯤 더 되는 손풍금이 전부다.
그나마라도 아버지가 흥얼거리는 찬송가를 듣고 음계대로 손풍금을 쳐 보는 것이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아들의 손에 연필을 쥐어주고 함께 손을 붙들고 ㄱ, ㄴ, 가나다라 열심히 글을 가르쳐 본다. 하지만 일반 국민학교에서는 맹인을 받아줄 수 없다 하니 여덟 살이 되어도 조그맣게 운영하는 만두가게에 데리고 다니는 게 다였다.
"얘는 몇 살이에요?"
"이제 여덟 살 됐어요.... 일반 학교에서는 안 받아준다고 해서 가끔 가게 데리고 나와요"
"모르셨구나... 저기 청와대 근처 가면 이런 애들도 먹여주고 가르쳐 주는 학교가 있대요... 얼른 데리고 가 보셔요"
손님의 말에 어머니는 만두가게에 나가 장사를 하는 대신 아버지는 다음날 부랴부랴 아들 손목을 잡고 버스를 갈아타고 서울맹학교를 찾아간다.
입학일이 일주일이나 지난 상황이라 내년에 오라는 교장선생님의 말에 거의 반나절 내내 빌다시피 사정사정해서 겨우 학교에 입학시켰다.
거의 모든 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지만 한 달간은 집에서 통학이 가능하다 하니 매일 아침 집을 나와 수업이 끝날 때까지 교실 뒤편에서 기다렸다 집으로 데려가기를 반복했다.
그렇다고 수업시간을 허투루 보내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점자를 함께 익혀두었다 집에 돌아와선 한글 대신 점자를 다시 가르친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는 학교 근처까지 데려다주고는 아들이 혼자 걸어 학교로 들어가는 것을 뒤에서 지켜본다. 여기저기 부딪히기도, 자빠지기도 하는 것을 지켜보자면 마치 아들의 앞날이 저렇게 고생스러울 것만 같아 가슴이 쓰리지만 그럴 때마다 '주님... 저 아이를 지켜 주세요' 하며 웅얼거리듯 기도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매주 토요일이면 학교에서 집으로 아들을 데리고 왔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다시 학교 기숙사로 돌려보낸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부터는 혼자 케인을 들고 버스를 갈아타며 학교로 돌아가곤 했다.
다시 기숙사로 돌아갈 무렵이면 어머니는 입 짧은 아들을 위해 곤로 불에 석쇠를 얹어 김을 굽고 그 위에 기름칠을 하고선 소금을 흩뿌린다. 그리곤 점심, 저녁으로 일주일치를 나누어 담아 가방 속에 넣어 주신다.
그럼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신월동에서 출발해 서울역에서 하차한다.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어 매번 역에서 서울 맹학교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다.
기차역이 있는 서울역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래서인지 그곳 정류장에 도착하면 매퀘한 매연 냄새와 뒤섞인 귤 또는 바나나 냄새가 진동하듯 코를 찌른다.
매번 침을 꿀떡꿀떡 삼켜가며 참는 게 일이었지만 그날은 용기 내어 입 밖으로 뱉어본다.
"나도 바나나 먹고 싶다...."
천지사방 보이는 것 없는 아들이지만 바나나라는 과일은 냄새만으로도 군침 돌게 하는 것인가 보다.
한 송이 턱 하니 안겨주면 좋겠지만 가난한 아버지는 한 개를 떼어 파는 천 원짜리 바나나 값을 겨우 치른 후 껍질을 벗겨낸다. 그러자 아찔할 만큼 달짝지근한 향이 정류소를 가득 메울 정도다.
이렇게 맛나게 먹는 바나나를 원 없이 사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들 입에 붙은 바나나 속껍질을 떼어주며 생각해 본다.
하지만 현실은 변변한 집 한 채도 없어 세를 얻을 땐 장님 아들이 있다며 집을 내주는 주인도 별로 없을 정도다. 이러니 앞으로 아들이 홀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철옹성처럼 단단한 벽에 부딪힐 때마다 생채기가 생겨나고, 피도 나고 아프겠지? 남들보다 몇 곱절은 더 힘들어질 아들의 앞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심정이다.
"엄니, 누워봐요... 오랜만에 안마 한 번 해 줄게....... 근데 뱃속에 뭐가 만져지네? 병원 가 보셨어?"
"아니... 안 가봤어.. 뭐가 잡히냐?"
"응, 제법 큰데? 아프지는 않어요?
"글쎄... 아무 느낌 없어...."
십 년 전쯤 맹인 자식을 키우며 갖은 풍상을 겪던 엄니는 그 후 얼마 안 있어 숨이 가쁘다 하셨다.
결국 손에 잡히던 그것은 난소에 자리 잡은 악성 종양이었다.
이만큼이라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지금 죽어도 괜찮다 말씀하시며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받아들이시던 어머니는 수술 후 일곱 번의 방사선 치료 계획 중 세 번의 치료를 받다 천국으로 떠나셨다.
열이 펄펄 끓던 만 네 살 딸아이가 감기인 줄만 알았었다. 뒤늦게 영등포에 있는 병원으로 들쳐 엎고 가 보니 뇌수막염이라 했고, 손 쓸 새가 없도록 그날 밤 딸아이를 보냈다.
일찌감치 가슴에 묻어버린 딸, 그리고 평생 앞을 볼 수 없다는 맹인 아들......
부모님은 신앙이 아니었다면 맨 정신으로 사는 게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오래전 시신기증을 하신 부모님이라 어머님의 시신을 안치도 못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아들의 마음은 너무도 헛헛하다.
"엄마, 고마웠어....... 엄마, 고마워!!!!"
목이 쉬도록 외치며 울어대지만 오히려 눈먼 아들을 걱정하며 떠나셨을 어머니는 이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그 후 홀로 된 아버지는 별로 내색은 않으셨지만 그 빈자리가 너무도 그리웠던지 기억을 잃는 병에 걸렸다.
작년쯤이었나? 그때만 해도 어느 정도 정신이 있을 때였는지 집으로 가려는데 도저히 방향을 찾을 수 없자 '내가 이제 정신이 없어져가나?' 싶더란다. 더럭 겁이 나더란다.
여기저기 방황하며 아버지는 버릇처럼 이렇게 웅얼거리듯 기도를 하셨단다.
'하나님, 가져가시려면 목숨도 가져가시지... 정신만 가져가시면 어떻게 해요.....'
그 말을 듣던 남편은 돌아서 아버지 몰래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보란 듯이 번듯한 자식을 키우는 부모도 이 걱정 저 걱정이 한가득인데 앞 못 보는 자식을 키울 그 시절,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다리에 난 무수한 상처를 볼 때마다, 세상에서 멸시받는 자식을 볼 때마다 그 심정은 오죽했을까....
어쩌면 그나마 눈이 보이는 비장애인 아내를 맞이한 것이 부모에게는 최고의 효도가 아니었을까?
손주들은 볼 수 있다는 것이 세상 가장 큰 기쁨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홀로 남은 아버지는 점점 더 기억을 잃어가는 일이 빈번하다.
엄니, 언제나 이름만 불러도 눈물 나는 내 엄니.....
어버이날이래도 섬길 어머니가 나는 없네....
엄니, 요즘은 아부지가 매일 새벽 밖을 나가요...
날이 갈수록 고집도 세 지고,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는 게 일이야...
엄니가 옆에 있었다믄 아부지는 괜찮았을까?
나 가끔 말이야.... 이상해...
가끔 내 뒤편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거든....
나를 쓰다듬듯.. 격려하듯 나를 맴돌다 바람처럼 스르륵 사라지는 그런 느낌....
그거 엄니 아녀?
하나님을 믿는담서 이런 얘기 하믄 너무 이상할까?
그렇지만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 느낌을 부정할 수도 없고, 무섭지도 거부감이 들지도 않는 게 꼭 엄니가 나를 만지고 가는 느낌이 계속 들어서..... 난 그걸 엄니라 생각하게 됐어....
잘 살라고... 나 없어도 잘 살라고 생전처럼 쓰다듬는 것 같아....
하지만 내 인생도 내 인생이지만 가끔 엄니, 아부지 생각하믄 참 눈물 나....
특히 엄니를 생각하면 더 그래요....
세상에서 말하는 자식 복이 있나, 물질의 복이 있나, 유순하고 착하기는 하지만 강한 생활력이 있는 남편 복이 있나.... 병신 자식 낳아서 손가락질받고, 고생만 하다 가신 우리 엄니를 생각하믄 마음이 너무나 아프지만 우리 나중에 천국에서 반갑게 만나요...
그때가 되믄 눈 떠서 엄니를 보게 될까?
난 한 번도 엄니, 아부지를 본 적이 없으니까 엄니가 먼저 와서 아는 척 좀 해 줘요....
눈먼 아들은 때로는 사는게 참 퍽퍽하지만 엄니 아부지가 주셨던 사랑을 듬뿍 먹고 자라서 힘들때마다 그 기억으로 잘 버티며 살고 있어요....
언제나 고맙고,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남편의 마음을 대신하여 어버이날 글을 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