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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Dec 01. 2023

내 남편은 시각장애인입니다.

 남편은 시각장애인입니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세상을 본 적 없는....


그가 오십여 년 전 세상에 태어나 백일쯤 되었을 무렵, 이웃 사람들이 아이 눈동자가 희뿌옇고 눈을 못 마주치는 것 같으니 병원에 가봐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에 부모님은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가게 된다.

병원에서는 '시신경은 살아 있으나 미국이나 소련에 가서 수술을 받으면 뿌옇게는 볼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손 쓸 방법이 없고, 평생 장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릴 들었단다.

병명은 '소아 백내장!!'....

요즘 국내 의술이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소아 백내장!!!'...


그러나 반백년 전, 크게 배운 것 없고, 살림살이도 변변찮던 일반 서민이 미국이나 소련에 간다는 것은 차라리 달나라에 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않았을까?

이후 부모님은 수십군데의 병원에 다녀보고, 이 교회, 저 교회, 이 기도원, 저 기도원에 가서 눈을 찌르듯 누르며 안수 기도도 받아보고....

그 애타는 부모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눈감은 다섯 살 아이가 몇 자릿수 암산을 척척 해 대니 동네의 구경거리였을게다..

일곱 살 때 고등학생이던 사촌 형들이 방에서 기타를 치다가 잠깐 나갔을 때 혼자 남은 아이는 방에 있던 기타를 이리저리 만져보며 나름 조율을 했던것 같다. 형들이 들어와 다시 기타를 치려다가 '야, 이거 누가 조율 해 놨냐?'라는 말에 그게 뭔지 몰랐던 아이는 '아니.. 그냥... 소리가 이상해서...'라고 했더란다.


하지만 장님일 뿐이다.

동네 아이들이 구덩이를 파 놓고 걸려 넘어지는 걸 보고 신나 하고, 병신이라 놀리는......


일반 학교에 가서 공부한다는 건 꿈도 못 꾸고 정보가 흔치 않던 세상이라 여덟 살이 되어도 부모님이 하시는 만두 가게에 나와 놀고 있던 어느 날, 손님 한 분이 아이를 보고는

'이런 애들도 먹여주고 가르쳐 주는 학교가 청와대 근처에 있으니 빨리 데려가 보라'고 했다.  

아버님은 다음날 부랴부랴 아이를 데리고 학교를 찾아갔지만 입학일이 이미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입학이 안된다는 걸 빌고 빌어서 겨우 입학을 하게 되었다.


여덟 살 때부터 시작된 맹학교 기숙사 생활.....

70년대의 열악한 상황에서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시각장애인 아이들의 모습은....

거의 버리다시피 학교에 떨궈진 아이.

집에서 젓가락 사용을 가르치지 않아 손으로 음식을 먹는 아이.

방에 감금되다시피 해서 걷지 못하다 학교에 와서 걸을 수 있던 아이.

열한 살, 열두 살이 되어서야 겨우 일 학년이 된 아이.

장티푸스 예방 접종 후유증으로 못 보게 된 아이.

심한 열감기 이후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

영양실조이던 아이가 기숙사 밥을 먹고 눈이 보이기 시작한 아이 등등...

별의별 기구한 사연으로 학교에 모였다.


냉난방이 열악하던 기숙사 방에서 여덟 살부터 고3(스무 살이 넘는 사람들도 많았다)이 함께 생활했고, 살을 에는 듯한 옛겨울, 앞을 못 보는 여덟 살 꼬마가 운동장에 있는 수돗가에 걸어 나가 맨손으로 속옷, 양말을 빨고, 방 청소 후 걸레 헹굴 물을 세숫대야에 받아 들고 가다 보면 세숫대야에 남아 있는 물 보다 옷과 신발에 흘려 얼어버리는 물이 더 많았고, 수도가 얼어붙어 두 사람이 수도꼭지를 각자 입으로 불어서 파이프에 온기가 전해지면 그때서야 물이 나와 그나마도 그 찬 물에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으면 내 얼굴인지 남의 머리인지 모르게 얼어붙었다던 불쌍한 그 시절...


열한 살이던 어느 음악 시간, 교과서의 동요를 조옮김 하며 풍금을 치는 선생님께 소리가 이상하다며 음계를 알지 못하는 아이가 '나가서 직접 풍금을 쳐봐도 돼요?'라고 했다. 아이는 그때서야 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 재주가 있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 한 번도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었지만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교회 반주를 시작했을 만큼 음악에 소질이 있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운 탓에 음악을 정식으로 배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중학교에 입학하자 부모님 몰래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고, 작곡과를 꿈꾸며 음악 공부를 시작했으나 일본에서 수입되는 비싼 점자 악보를 비롯한 음악을 하기 위한 경제적인 벽을 뛰어넘는 것이 너무나 힘들게 느껴졌다. 그나마도 일년쯤 피아노를 배우다 그만둬야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클래식을 소개하며 들려주는 동아리를 만들고, 고등학생 신분으로 맹인교회 실내악 지휘를 하고, 연세대학교 백주년 기념관에 합창단을 세우고, 88 올림픽 폐막후 패럴림픽 개막식에서는 스네어 드럼을 치며 퍼레이드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장애인 특례입학 제도도 없었고, 오히려 편견이 더욱 극심했던 사회분위기와 경제적인 어려움을 뚫고 대학교를 간다는 것은 부모님께도 불효였고, 입학할 자신도 없었던 그는 음대 진학을 포기하고 너무나 사랑했던 음악을 버리게 되었다.

마음을 잡지 못하던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강 다리 위에 올라가 보기도 하고, 줄을 목에 걸어보려고도 했지만 그때마다 부모님 생각에 마음을 되돌리곤 했다.


맹학교에서 가르쳐준 안마를 배워 고3 2학기부터 호텔에 취업을 나갔고, 호텔에 일본인 관광객이 많았던지라 혼자 케인을 들고 종로에 있는 일본어학원에 다니며 공부를 하고, 때로는 카페에 나가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주말 예식장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기도 했다.

그 무렵 직장 근처에 혼자 집을 얻어 자취를 시작한 그는 겨울이면 미끄러운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다 미끄러져 다시 원점에 와 있고, 새벽에 연탄불을 갈고, 곤로에 찌개를 끓여 먹던 스무 살 청년....


지금 그 남자는 수많은 비난과 멸시를 받아왔지만 꿋꿋하게 살아내어 2남 2녀와 아내를 책임지는 여느 남편과 같은 가장으로 살고 있다.


재활용 쓰레기, 음식물 쓰레기 버려주는 남편은 꿈도 꿀 수 없다.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 어릴 때 등하원은 남편한테 손을 벌릴 수 없었지만 나는 내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

큰 아들이 열세살 때 자긴 가난하면 다 게으르고 멍청하다는 나쁜 편견이 있었는데 그걸 깨 준 사람이 아빠, 엄마라고 했다.

우리 부모님이 누구보다 똑똑하고 누구보다 지혜롭고, 부지런하다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너무나 부족하지만 그런대로 우리가 잘 살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함이 느껴졌다.  


쓰레기를 버려주진 못하지만 생두를 직접 볶아 원두를 갈아내어 끝내주게 멋스러운 커피를 내려주고

내 어지러운 가방을 정리해 주고

내 옷매무새를 만져 주고 

아무렇게나 꼬인 내 가방끈을 정리 해 주며

나로서는 사용설명서를 몇 번을 읽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계구조와 가구들을 그저 만져만보고 척척 조립하며 전기 배선을 만지고 형광등을 갈아 주는...


칡흙같이 어두운 곳에 계단이 있을 때는 오히려 그가 내 손을 잡고 앞을 헤치고 나가며

억울한 상황에 놓였을 때 나를 보호해 주고

나를 매일 안아주는 내 남자.....


한치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 여섯 식구를 당당하게 먹여 살리는 든든한 내 특별한 사람....


 남편은 시각장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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