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무더웠던 열 여덟. 그 해 여름, 내 피서지는 연경이네 집 거실 한 가운데였다.
여름 방학이 시작된 이후 엄마, 아빠가 출근하시면 나는 어김없이 침대를 빠져나온 뒤 옷을 챙겨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옆 동에 사는 연경이네로 향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 동에 사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능숙하고, 익숙하게.
공동현관 비밀 번호를 누르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8층에 도착하면 매일 같은 시간, 연경이가 문을 열고 나와 나를 반겨주었다.
그 시기 여러 남자 아이돌에 푹 빠져 있었던 나와 연경이는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방탄 소년단의,
또 어느 날은 세븐틴의, 또 어느 날은 엑소의 무대 영상을 돌려보며
방구석에서 우리만의 콘서트를 즐기기도 했고,
가끔은 에어컨 바람에 차가워진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드라마를, 또 영화를 보기도 했다.
하루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소파에 누워 있는 연경이를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성인이 되어서도 너랑 이렇게 지내고 싶다.”
“이렇게 지내면 되지. 그때는 맥주도 맘껏 마시자.”
맥주라는 이야기에 나와 연경이는 소리 내어 웃었다.
우리가 맥주라니. 이제 막 열 일곱의 여름을 보내던 나에게는 그저 상상 속의 일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연경이와 졸업을 해도, 다른 대학에 가도 평생 친구로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성인이 된 나와 연경이가 맥주를 마시는 일은 그저 상상 속의 일로 남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열 아홉이 된 나와 연경이는 더 이상 서로가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니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의 우정은 예기치 못하게 끝났다.
내 옆에는 다른 친구가 있었지만, 이따금 연경이가 그리웠다. 한 때는 엄마, 아빠보다도 더 오래 붙어있던
연경이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사실이 슬펐다.
차라리 싸운 거나, 절교를 하기로 한 거였다면 좋았을 텐데.
내 마음 속에 작은 찝찝함이 하나 쌓였다.
연경이 이후 가장 친한 친구 사이였던 친구와 성인이 되어 연락이 끊겼을 때도,
같은 매장에서 근무했던 사람들과 퇴사 후 멀어졌을 때도,
대학교 동기가 졸업 후 함께 놀던 무리와의 연락을 완전히 끊었을 때도 똑같았다.
그때마다 마음 속에 있는 찝찝함의 몸집이 점점 커졌다.
어느 영화 감독의 말처럼 우정은 연애 관계와 달리 모호했고, 사귀거나 헤어지는 그런 분명한 프로세스도
없었다. 사람을 너무 좋아했던 내 주위는 대부분 사람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렇기에 주위를 채우던 사람들이 이유 없이 빠져나가면 나는 여과 없이 흔들렸다.
마음 속에 있는 찝찝함은 하나의 형태가 되었고, 다듬어지지 않은 그 모서리가 나를 쿡쿡 찔렀다.
'예상치 못한 이별의 사유가 사실 나에게 있었던 건 아닐까?'
모서리에 찔려 생긴 상처가 벌어질 즈음, 예전에 알고 지내던 언니 한 명을 만났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언니에게 조심스레 얘기했다.
"사실 언니를 못 볼 줄 알았어요. 보고 싶지만 못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졌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니까요. 이제는 제가 모든 관계를 망쳐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참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언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변함 없는 우정이 있을까? 결국 우정도 연애랑 똑같아. 두 사람이 하는 거잖아.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아니, 어쩌면 우정이 연애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어. 연애는 상대방한테 요구라도 할 수 있지 친구 사이는 그것마저 힘들잖아.”
“모든 이별은 자연스러운 거야. 네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일에 너무 연연하지 마.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시절이 안 맞으면 엇갈린다고 했어.”
우정은 연애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언니는 모든 관계는 똑같다고 얘기했다.
노력해서 관계를 이어나가는 인연도 있지만,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들이 달라져서 시절이 맞지 않아서 엇갈리는 경우가 실은 더 많다고.
그러니 그 이유를 너에게서 찾지 말라고.
언니의 말 한 마디에 나를 쿡쿡 찌르던 것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언니와의 만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휴대폰 화면 너머 SNS 속에는 과거 나를 지나쳤던 인연들이
넘실거렸다.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연경이었다.
더 이상 연경이가 그립지는 않았지만 열 여덟, 연경이와 함께 했던 그 해 여름을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핸드폰 화면을 끄고 흔들리는 버스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연경이를 생각하니 지금 내 곁에 있는 여러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들도 언젠가 연경이처럼 내 곁을 떠나겠지?'
언젠가 찾아올 이별을 떠올리니 마음이 조금 울적해졌지만,
그 사람들이 더 이상 내 곁에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그들과의 추억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 남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는 불안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 해 여름 연경이에게 했던 것처럼,
지금의 인연에게 최선을 다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