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강대국 사이에서 길을 잃은 나라
― 약탈의 시대, 한국 외교는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가
세계 질서가 흔들릴수록 국가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어디에 설 것인가, 무엇을 지킬 것인가, 그리고 어떤 태도로 말할 것인가.
최근의 국제 정세는 더 이상 외교를 미묘한 수사나 우아한 균형의 영역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요구는 노골적이고, 압박은 계산되며, 거래는 공개적으로 가격표를 단다. 이 새로운 질서 앞에서 국가의 외교는 말보다 먼저 자세로 평가받는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한국 외교가 남긴 장면들은 유독 불편하다.
중국을 향해서도, 일본을 향해서도, 미국을 향해서도 한국은 늘 먼저 몸을 낮춘다. 신중함이라 부르기에는 반복적이고, 실용이라 말하기에는 방향이 없다. 이 자세는 전략처럼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정체성 없는 굴종에 가깝다.
중국 방문 장면을 떠올려 보자.
한국 대통령은 베이징에서 말을 고르고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발언을 이어간다. 상대는 몸을 뒤로 젖힌 채 듣기만 한다. 관계 개선을 말하지만, 대화의 균형은 시작부터 무너져 있다. 외교는 사정이 아니다. 외교는 대등한 위치에서의 교환이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 한국은 교환자가 아니라 “잘 지내보자”고 먼저 말하는 쪽에 가까웠다. 이것은 전략이 아니라 습관이며, 실용이 아니라 자기 위치를 스스로 낮추는 반복된 선택이다.
일본을 향한 태도도 다르지 않다.
미래를 위해 함께 나아가자고 말한다. 불편한 과거는 언급하지 않는다. 듣기에는 성숙해 보이지만, 국제 관계에서 과거란 덮는 대상이 아니라 정리해야 할 전제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 위에 쌓은 미래는 언제나 한쪽만 참는 구조로 굳어진다. 과거를 말하지 않는 외교는 갈등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의 비용을 미래로 이월하는 방식일 뿐이다.
이 태도는 미국 앞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트럼프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 대통령은 스스로를 ‘페이스메이커’에 비유한다. 상대를 ‘피스메이커’로 띄우고, 자신은 보조 역할을 자처한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관세는 일부 낮아졌지만, 3,500억 달러에 달하는 투자 약속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럴 바에야 이 돈으로 관세를 충당했어도 될 일을, 먼 곳까지 찾아가 자존심을 내려놓고 얻어낸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것은 협상이라기보다 조공에 가까운 거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이를 성과라 불렀다.
문제는 이 장면들이 서로 다른 나라를 상대로 반복된다는 점이다.
중국 앞에서도, 일본 앞에서도, 미국 앞에서도 한국은 늘 먼저 고개를 숙인다. 이것은 외교 노선의 선택 문제가 아니다. 국가가 스스로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에 대한 인식의 문제, 다시 말해 정체성의 문제다.
지금 세계는 제국의 질서가 붕괴한 이후의 과도기에 들어섰다.
규칙은 약해지고, 힘은 노골화되며, 거래는 외교의 언어를 대체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식 외교는 더 이상 은유가 아니다. 그는 요구하고, 강요하고, 가격을 매긴다. 관세와 투자, 안보와 동맹이 모두 거래 대상이 된다. 이것은 협상이 아니라 약탈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노골적인 약탈 앞에서 세계가, 그리고 한국이 거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외교의 문제는 약함이 아니다. 좌표 상실이다.
한국은 미국에는 동맹을 말하고, 중국에는 중재를 요청하며, 일본에는 미래를 이야기한다. 겉으로 보면 바쁘고 성실한 외교다. 그러나 전체를 놓고 보면 한국이 어디에 서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 외교는 “누구를 화나게 하지 않을 것인가”에만 집중해 왔다. 그 결과, 누구에게도 분명한 선을 긋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의 약탈적 요구 앞에서도 ‘현실적 타협’이라는 말로 물러섰고, 그 양보는 다시 더 큰 요구를 불러왔다. 강대국 외교의 문제는 양보 자체가 아니다. 원칙 없는 양보가 반복된다는 데 있다. 한 번의 타협은 외교가 될 수 있지만, 기준 없는 타협의 반복은 상대에게 요구의 상한선을 알려주는 신호가 된다.
물론 한국 혼자서 이 구조를 바꾸기는 어렵다.
국제기구는 무력하고, 강대국들은 각자 계산 중이며, 중소국들은 흩어져 있다. 지금의 세계는 약탈의 비용은 낮고, 저항의 비용은 높다. 이 구조에서는 누구도 트럼프를 정면으로 막지 못하고, 결국 각자 흥정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 외교의 진짜 실패가 드러난다. 한국은 이 구조를 바꾸려는 외교를 하지 않았고, 그저 이 구조 안에서 “조금 덜 얻어맞는 법”만 고민해 왔다.
해법은 분명하다.
약탈은 개인을 상대로 할 때 가장 쉽고, 집단을 상대로 할 때 가장 비싸게 먹힌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미국에 줄 서는 외교도, 중국 눈치를 보는 외교도 아니다. 일본에 가서 드럼 스틱을 잡는 외교는 더더욱 아니다. 자유와 민주, 주권과 상호존중이라는 기준을 공유하는 국가들이 집단으로 선을 긋는 외교다. 유럽의 자유민주 진영, 아세안의 민주 국가들, 남미와 아프리카의 신흥 국가들이 각자 흩어지지 않고 약탈적 요구에 공동 대응한다면, 그 순간부터 약탈은 국제적 비용을 수반하는 위험한 선택이 된다.
한국은 이 가치 동맹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에 설 수 있는 나라다.
군사독재를 극복한 경험이 있고, 민주화와 성장을 동시에 통과했으며, 강대국과 약소국의 위치를 모두 경험한 나라다. 그래서 한국은 누군가의 하위 파트너가 아니라, 좌표를 제시하는 촉매 국가가 될 수 있다.
지금 한국 대통령이 해야 할 말은 복잡하지 않다. “우리는 동맹을 유지한다. 그러나 약탈적 요구에는 집단으로 대응하겠다. 외교는 거래가 아니라 기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주장을 미국 앞에서도, 다른 모든 나라 앞에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 때 한국 외교는 비로소 중심을 찾는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공모다.
약탈을 외교라 부르는 시대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선택은 가담에 가깝다. 한국이 계속 머뭇거린다면 우리는 약탈의 피해자가 아니라 약탈을 정상화한 공범이 된다. 이제 한국 외교는 “누구 편에 설 것인가”를 묻는 단계를 지나, “어떤 기준 위에 설 것인가”를 선택해야 할 순간에 와 있다.
말을 아끼되, 자세를 낮추지 말 것.
협상하되, 사정하지 말 것.
미래를 말하되, 과거를 지우지 말 것.
세계는 지금 고개 숙인 나라를 찾고 있지 않다.
자기 기준을 가진 나라를 찾고 있다.
외교는 겸손의 경쟁이 아니다.
외교는 자기 존엄을 지키는 기술이다.
지금 한국 외교에 부족한 것은 정보도, 인맥도, 실용도 아니다.
단 하나, 어떤 자세로 설 것인가이다.
시민시대 2026년 2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