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기사라면
내가 만약...
택시 기사라면
― 도시의 첫 얼굴
비가 오는 날이면 도시의 속도는 조금 느려진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만들고, 젖은 도로 위의 불빛은 번져서 희미하게 흔들린다. 길가에 서 있으면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서늘함 때문에 괜히 어깨를 한 번 더 움츠리게 된다. 급하게 접은 우산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바지 자락을 적시고, 신발 밑창에는 물기가 묻어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던 몇 걸음이 그날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그런 날 어렵게 잡아탄 택시 안은 바깥과 다른 온도를 가지고 있다. 문을 닫는 순간 따뜻한 공기가 먼저 닿지만, 동시에 어딘가 말 걸기 조심스러운 조용한 침묵이 함께 따라 들어온다. 목적지를 말하면 짧은 대답이 돌아오고, 와이퍼가 일정한 간격으로 앞유리를 쓸어내리는 소리만 반복된다. 차 안은 따뜻한데도 마음 한쪽은 이상하게 더 조용해진다. 비 오는 날의 택시는 집으로 가는 이동 수단이라기보다, 그날의 기분을 먼저 정해 버리는 작은 방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어땠을까.
택시는 단순히 사람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수단이 아니다. 낯선 도시를 처음 찾은 사람에게는 그 도시와 처음 마주하는 공간이 되기도 하고, 긴 하루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에게는 마지막으로 머무는 작은 쉼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택시 안의 몇 분은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다. 기사 한 사람의 말투와 표정, 짧은 한마디의 인사가 그날 하루의 인상을 바꾸기도 한다.
가끔 공항 앞에서 택시를 타는 여행자를 떠올려 본다. 낯선 언어와 낯선 거리 속에서 처음 만나는 현지인은 대부분 택시 기사일 것이다. 그 사람이 건네는 한 문장의 친절한 안내가, 그 도시 전체에 대한 첫인상이 되기도 한다. 반대로 아무 설명도 없이 차가 조용히 달리기만 하면, 그 침묵은 낯선 공간의 불안으로 남을 수도 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택시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하루의 피로가 어깨에 내려앉은 상태에서 앉게 되는 마지막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누군가가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라는 한마디를 건넨다면, 그날의 무게는 조금 달라질지도 모른다. 병원에 다녀오는 노인에게는 조심스러운 운전이 곧 배려가 되고, 비에 젖은 학생에게는 히터를 조금 더 높여 주는 선택이 작은 위로가 될 수도 있다.
도시는 수많은 제도와 건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람에게 남는 인상은 의외로 사소한 장면에서 시작된다. 공항에서 처음 만난 안내원의 표정, 식당에서 건네받은 짧은 인사, 그리고 비 오는 날 조용히 달리던 택시 안의 공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택시는 도시의 첫 얼굴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마지막 인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어렵거나 거창한 일은 아닐 것이다. 차 문을 여는 손님에게 먼저 “어서 오십시오”라고 인사를 건네고, 젖은 옷 때문에 불편하지 않도록 히터를 조금 더 조절해 주고, 길이 막히면 괜히 조급해하지 않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해 주는 일.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서두르지 않도록 천천히 정차하고, 문을 여닫는 순간까지 조심하는 일. 낯선 사람이 탄다면 이 도시의 주요 길과 분위기를 짧게라도 알려 주는 일. 어쩌면 그런 작은 배려 하나가, 그 사람에게는 이 도시를 다시 찾고 싶은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친절은 거창한 덕목이 아니라 잠깐의 선택일 뿐이다. 그러나 그 잠깐의 선택이 모여 한 도시의 인상을 만든다.
제도가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어도, 결국 사람에게 남는 기억은 사람의 표정과 말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몇 분의 이동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낯선 공간에서의 첫 안심이 되기도 한다.
나는 완벽한 친절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누구나 피곤한 날이 있고, 마음이 무거운 날도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마음을 여유 있게 두는 선택이 가능하다면 그 순간의 공기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차 안의 몇 분이 조금 더 편안해지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의 기분도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다.
문명은 거대한 제도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낯선 사람에게 건네는 한마디, 잠깐의 배려, 조심스러운 운전과 같은 아주 작은 태도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자리에 앉아 있느냐보다, 그 자리에 앉아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느냐가 더 중요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비가 오는 날, 다시 택시를 탈 때면 나는 종종 그 장면을 떠올린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먼저 인사를 건네고 싶다고.
그 짧은 한마디가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덜 쓸쓸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 정도의 변화로도 이 도시는 조금 더 따뜻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