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협상의 덫

강탈의 시대에 문명의 존엄을 지키는 법

by 나팔수

[주말논단] 한미 협상의 덫 — 강탈의 시대에 문명의 존엄을 지키는 법


세상에는 거래로 포장된 약탈이 있다.

그것은 총칼이 아니라 계약서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는 ‘투자’라는 이름의 거대한 청구서는, 그 본질이 교묘한 강탈임을 숨기지 않는다. 3,500억 달러 ― 한 나라의 백성이 피땀으로 모은 부를

외교의 미소 속에서 내어놓으라는 요구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 협상이 아니다. 한 나라의 존엄이 시험대에 오른 순간이다.


1. ‘투자’라는 이름의 착취


미국은 언제나 ‘자유무역’과 ‘공정 경쟁’을 외친다. 그러나 그 자유와 공정은 언제나 자신에게만 유리한 룰일 때 존재했다.

이번 협상도 다르지 않다. 한미 협상의 핵심은 상호 호혜가 아니라, 지정된 희생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구조다. 한국의 산업과 자본을 달러 체제 안에 묶고, 금융과 기술의 혈관을 미국의 이익망 속에 결박시키는 것 ―이것이 진짜 ‘협상의 덫’이다.


2. 계산 하나 ― 국민에게 줄 수 있는 돈


3,500억 달러는 환율 1,400원을 적용하면 약 490조 원이다. 이 금액이면 대한민국 국민 5,200만 명 모두에게

연 100만 원씩 9년 넘게 지급할 수 있다.

그 돈으로 기초복지의 빈틈을 메우고,

교육·돌봄·의료의 사각지대를 줄이며,

청년과 노년의 불안을 완화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막대한 금액을 ‘투자’라는 이름으로 타국에 헌납하려는 것을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그것은 협상이 아니라 깡패의 청구서에 도장을 찍는 행위다. 깡패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돈을 나눠내면 안 되느냐고 절규하는 한국외교가 측은할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도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은 아주 점잖은 미소로 이미지를 관리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의 강탈에 동맹의 고리를 끊을 수도 있다. 이 한 마디면 족할 것을.


3. 조지아 구금 사태와 ‘제조업 비자’의 그림자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한국인 근로자 300여 명의 구금 사태는 이 협상의 본질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수십조 원을 투자한 한국 기업의 현장이 한순간에 미국 정부의 단속 대상이 되었고, 노동자들은 합법 체류자임에도 수갑을 찼다. 그 뒤 미국은 ‘비자 워킹그룹’을 만들어 B-1 비자와 ESTA를 완화하겠다고 발표했고,

트럼프는 ‘제조업 비자’를 긍정 검토한다고 밝혔다. 마치 선심 쓰듯이. 그러자 한국 정부와 기업은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굴욕의 현장을 까맣게 잊은 듯이 말이다.


4. 굴복 이후의 태도 ― 식민지 근성과 사대주의 근성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굴욕을 겪은 뒤의 태도다. 한 나라가 모욕을 당하고도 “협상이 잘됐다”라고 감사 인사를 전하는 순간, 외교는 주권의 언어가 아니라 종속의 미학으로 전락한다. 폭력보다 무서운 것은 폭력의 미화이며, 강요보다 치명적인 것은 자발적 복종의 미화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깊이 뿌리내린 식민지 근성, 그리고 그보다 더 교묘한 내면화된 식민성이다. 식민의 굴레는 끊어졌어도 그 근성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 모욕을 당하고도 감사를 표하고, 억압을 받으면서도 ‘협력의 진전’이라 포장하는 태도 ― 그것은 외세의 압력이 아니라 우리가 길러온 사대주의 근성이다. 강한 나라 앞에서 본능처럼 고개를 숙이고, 양보를 미덕으로, 굴종을 지혜로 착각하는 오래된 병. 그것이야말로 정신의 식민화다.


5. 패배주의 근성 ― ‘도와준 나라’라는 굴레


그리고 이 모든 근성의 밑바닥에는

아직도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패배주의 근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미국을 ‘도와준 나라’로만 기억하며, 그때의 원조 기억 속에 스스로를 영원한 피보호자처럼 여긴다. 그래서 미국에 맞서거나 저항하는 생각 자체를 ‘무례’라 여기고, 국가의 존엄보다 ‘관계의 유지’를 더 두려워한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우리는 결국 미국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깊은 패배의식이 뿌리내려 있다.


문제는 이러한 패배의식이 일부 지도층만의 것이 아니라, 상당수의 국민들에게까지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 동안 주입된 ‘도움을 받는 나라’의 기억이 이제는 한 세대의 사고방식으로 굳어졌다. 그래서 미국을 비판하는 일을 두려워하고, 굴욕을 지적하는 이들을 ‘국익을 해치는 자’로 몰아붙인다.


이것은 이미 단순한 외교적 태도가 아니라, 국민적 정신 구조의 병리다.

자가 약한 자를 때릴 때, 처음에는 센 자가 나쁜 놈이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계속 맞으면서도 아무 저항 없이 고개를 숙이고 또 얻어맞는다면, 그건 이제 약한 자의 비극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힘의 불균형보다 더 위험한 것은 그 불균형을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이것이 바로 패배주의 근성이 낳은 자기 굴종의 체념이다. 이 근성이 살아 있는 한, 한국의 외교는 독립이 아니라 영속된 종속의 변주로 남을 것이다. 그들의 굴종은 필요의 언어를 쓰지만,

그 실체는 두려움이며, 그 두려움이야말로 문명의 퇴행을 낳는 씨앗이다.


6. 깨어 있는 시민, 문명의 마지막 방어선


이 싸움은 외교관의 서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국민이 진실을 알고, 분노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투자”라는 이름 아래 숨은 불공정을 들춰내는 것은 시민의 의무다. 언론은 진실을 드러내야 하고,

학계는 구조를 분석해야 하며, 정치인은 국민의 편에 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스스로 문명의 이름을 저버리는 것이다. 분노는 감정으로 머물면 소모되고,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힘이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 하나 ―

협상 전문 공개, 국회 청문회, 국민 감시.

이 세 가지가 주권을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다.


7. 문명의 존엄을 지키는 법


문명의 존엄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

그것은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용기,

스스로의 가치를 외세에 팔지 않는 자존에서 비롯된다.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 다시 한번 ‘인간다운 나라’로 서는 것이다. 그것이 한미 협상의 진짜 결론이며, ‘강탈의 시대’를 끝내는 유일한 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무비자의 땅, 통제 없는 섬